[여적] MVP의 요건

차준철 논설위원 2021. 11.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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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프로야구 kt가 1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직후 박경수가 목발을 내려놓으며 환호하는 동료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의 주인공은 단연 ‘무쇠팔 투수’ 최동원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 7차례 경기 중 5차례나 나가 4차례 승리를 따냈다. 매일 아니면 하루 걸러 마운드에 올라 무려 610구를 던졌다. 20년 후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축승회 때 쌍코피가 주르륵 흘렀다”고 털어놓았다. 시쳇말로 우승을 ‘하드 캐리’한 그였지만 그해 한국시리즈의 최우수선수(MVP·Most Valuable Player)는 그가 아니었다. 3승3패로 맞선 7차전 8회 역전 3점 홈런을 터뜨린 유두열이 수상자로 뽑혔다. 최후의 승리를 결정지은 ‘큰 것 한방’이 MVP를 가른 것이다.

스포츠 세계에는 MVP가 꽤 많다. 1년, 한 시즌 동안 최고의 기량을 펼친 선수들이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기도 하지만 매 경기 최고로 활약한 선수들도 데일리 MVP로 불린다. 한국시리즈처럼 챔피언을 결정하는 단기전 승부에서도 MVP가 뽑힌다. 평소 성적이 출중한 스타 선수들이 MVP로 뽑힐 가능성이 높은데, 단기전에서는 ‘미친 선수’가 왕왕 나타난다. 평소에는 그저 그런 실력을 보이다가 단기전에 기대 이상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쳐 승리를 이끄는 선수를 말한다.

올해 한국시리즈 MVP로는 우승팀 KT 위즈의 37세 베테랑 내야수 박경수가 뽑혔다. 프로 19년차에 처음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역대 최고령 MVP가 됐다. 유망주 시절과 한때 전성기를 뒤로하고 말년에 찾아온 기회에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다. 한국시리즈 2차전 때 몸을 날리는 호수비로 승리 흐름을 가져온 순간이 빛났다. 3차전에도 악착같이 수비하다 종아리 근육이 찢어져 4차전을 뛰지 못했지만 MVP 자격은 충분했다. 1할대 타율로 시즌 성적이 변변치 않았어도,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헌신으로 팀을 하나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MVP는 가장 가치 있는 선수를 뜻한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묵묵히 제 일에 최선을 다하며 기다려온 박경수는 MVP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우승 확정 뒤 아픈 다리를 절룩이며 그라운드로 걸어가다 그를 기다리던 동료들 앞에서 목발을 놓고 얼싸안은 장면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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