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공범 몰린 스무살 청년 '무죄' 확정 [인간 대포통장]

2021. 11.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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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청년 취업사기 속아 현금수거책 연루
'고객' 3명 만나 7150만원 받은 후 무통장 입금
항소심 재판부 "원심 무죄 판결 반하는 납득할만한 사정 없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최재원 작가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

지난달 27일 대구고등법원 법정에서 판사가 주문을 읽었다. 대면편취형 보이스피싱에 ‘현금수거책’으로 가담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최민정(21·가명) 씨의 무죄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스스로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대학진학을 준비하던 최씨는 지난해 미끼 구인공고에 속아 ‘거래처 사람을 만나 수금하는 업무’를 했다. 이게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피해금을 받아오는 범죄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올 4월 검찰은 그를 사기, 사문서 위조, 위조 사문서 행사 혐의로 기소했다.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판단한 것이다.

1심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국민배심원 7명은 검사의 주장과 변호인의 변론을 듣고, 재판부에 제출된 증거들을 살핀 끝에 최씨에게 죄가 없다고 평결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는 즉각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을 맏은 대구고법 2형사부는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판결문에 “(원심) 배심원의 평결이 잘못됐다고 볼 수 없고 원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충분하고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지 않다”고 적었다.

최씨의 1심 변호인이었던 강수영 변호사(법무법인 맑은뜻)는 “검사는 줄곧 법리적으로 피고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1심 결과를 뒤집을)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진 못했다”며 “법원도 ‘뭔가 이상했다’라는 점만으로는 큰 규모의 재산범죄의 공범으로 처벌하기엔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민정(가명) 씨의 항소심 판결문. 무죄를 선고한 1심 결론이 유지됐다.
갓 스무 살, 어쩌다 공범으로 몰렸나

그간 보이스피싱은 비대면으로 범죄가 성립됐다. 검사나 금감원 직원을 사칭하는 ‘그놈 목소리’로 피해자를 속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받는 대면편취 방식이 폭증했다.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심부름꾼을 온라인에서 물색했다. 채용 사이트, SNS 등 온라인에 ‘가짜 구인공고’를 뿌려서 일자리가 필요한 평범한 시민을 낚았다.

최씨는 조직으로서는 낚기 쉬운 대상이었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외국에서 보냈다. 그러다 지난해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귀국했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졌고 설상가상 집에선 유학비용을 지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외국에서 미래를 설계했던 20세 청년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부모님과 갈등 끝에 스스로 돈 벌어서 앞으로 계획대로 살겠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지난해 11월 가출청소년쉼터에서 지내면서 이력서를 적어 알바천국에 올렸다.

일주일 뒤 무역회사의 인사담당자라는 이가 이력서를 보고 연락해왔다. “단순행정, 회계업무 등을 하면 된다. 영어 가능자를 우대한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면접’만 거치니 입사가 결정됐다. 처음엔 계좌이체 같은 단순업무를 시키더니 “거래처 고객을 만나 수금해서 무통장 입금하는 업무를 해 달라”고 했다.

11월 17~23일 5차례에 걸쳐 ‘고객님’ 3명을 만나 ‘대금’ 7150만원을 받았다. 그걸 은행 자동화기기(ATM)로 무통장 입금했다. 하지만 고객으로만 알았던 이들은 보이스피싱 피해자, 그들이 건넨 대금은 피해금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안 사실이었다. 최씨는 “한국에서 회사생활 경험이 없고 보이스피싱이란 단어도 몰랐다. 돈이 필요해 알바를 했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헤럴드경제 취재팀이 보이스피싱 대면편취 사건 판결문 252건, 257명의 현금수거책 피고의 형량을 분석했다. 전체의 70%가 징역형을 받았다. 무죄가 나온 재판은 단 2건이었다. 초범이어도 보이스피싱 단순 가담자로 기소되면 형사처벌을 피하기 어려웠다. 권해원 디자이너
무죄 극히 드물어…대부분 형사처벌

취업사기를 당해 보이스피싱에 관여한 ‘현금수거책’들은 저마다 결백을 호소한다. 하지만 대부분 형사처벌을 면치 못한다. 헤럴드경제가지난해 7월부터 올 6월 말 사이 선고가 이뤄진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판결문 252건을 분석했더니 무죄는 2건뿐이었다. 70.0%가 징역형, 집행유예는 28.8%를 차지했다.

범죄 전력이 없던 초범도 보이스피싱에 엮이면 어떻게든 형사처벌을 면치 못하는 구조다. 형사정책적으로 “모르고 했다”고 주장하는 단순 가담자들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게 수사기관과 법원의 기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씨가 무죄를 받아낸 건 이례적이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전환한 점이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변호인들은 국민 눈높이에서 사건의 진실을 설명해야 무죄를 기대할 수 있다고 봤다. 검찰은 국민참여재판 전환을 반대하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 씨의 1심 판결문에서 배심원 평결결과를 서술한 대목

변호인은 배심원들에게 증거를 보여주면서 “이런 사람도 징역 살게 하고 인생 다 포기시켜야 하느냐”고 호소했다.

익명을 요청한 국선변호사(재판 참여)는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현금수거책 일을 한 피고가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를 확보한 점이 유리한 부분”이었다며 “조직원이 실제 회사인 것처럼 행세하고 고객님, 직원, 사원번호, 퇴사, 급여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대화를 배심원들에게 제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피고 최씨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했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겨우 스무 살에 또래는 상상도 못하는 경험을 했다. 그가 무죄 확정에 기뻐하지 못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변호인들이 전했다. 보이스피싱인 줄 몰랐더라도 피해자들을 만나 7000만원 넘는 거금을 받았다는 죄책감을 지우긴 힘들다는 것이다.

기획취재팀=박준규·박로명 기자

[헤럴드경제 디지털스토리텔링 : 인간 대포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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