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회복하는 세계, 갈림길에 서다

한겨레 2021. 11. 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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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저소득 개발도상국가의 절반 정도가 부채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부터 파국을 막으려면 이들 국가를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소문만 무성하고 도움의 손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일자리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노동시간 손실 규모는 2020년 사사분기 이후로 줄어들지 않았다. 노동시장 회복이 지난 1년간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는 뜻이다. 코로나19 발생 이전 시기와 비교해보면, 약 1억2천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ㅣ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결국 취소되었다. 에스토니아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올해 초부터 코로나19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고 12월로 날짜를 정한 뒤, 1천여명에 이르는 사람이 참석하기로 한 행사다. 여기서 ‘참석’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참석이다. 비행기 타고 호텔에 체크인하고 행사장에서 배지를 받아서 발표 듣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발언하는 과정을 말한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0%에 가까운 사람이 백신을 맞았으나, 미접종자 중심으로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대규모 행사는 다시 불가능해졌고, 1년 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올해 초에는 걱정도 컸지만 희망의 불씨도 많았다. 각종 국제기구 및 정부 보고서도 비관적 얘기만 하는 대신, 백신을 불쏘시개 삼아 희망적 메시지를 내보려고 애썼다. 대부분 올 하반기부터 코로나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경제와 고용의 회복이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결과적으로는 섣부른 낙관이었다.

경제성장만 두고 보면,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지난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경제 회복이 계속되지만 코로나19 상황의 유동성 때문에 회복의 탄력을 잃고 있다고 했다. 이런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전망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겨져 있다. 저소득 개발도상국의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예상외로 선방하는데도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을 하향 조정한 이유다. 게다가 저소득 개발도상국가의 절반 정도가 부채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부터 파국을 막으려면 이들 국가를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소문만 무성하고 도움의 손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회복은 갈림길에 서 있다.

일자리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노동시간 손실 규모는 2020년 사사분기 이후로 줄어들지 않았다. 노동시장 회복이 지난 1년간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는 뜻이다. 코로나19 발생 이전 시기와 비교해보면, 약 1억2천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두가지 ‘착시’ 현상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 일자리 회복의 양극화가 더욱 극명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노동시장 회복에 제법 가속도가 붙었다. 반면 많은 개발도상국가는 다시 후진 중이다. 2020년 말에 선진국과 저소득 개발도상국의 노동시간 손실 규모는 모두 5%를 약간 상회하는 엇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따라서 선진국을 보고 세계 상황을 유추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일자리 감소가 실업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노동시장 퇴출로 이어졌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 중 3분의 2 이상은 일자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비활동인구로 전환했다. 구직을 포기한 사람은 실업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업자 수만 보고 일자리 사정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갈림길이 나타난 것은 운명 탓이 아니다. 갈라짐의 이유가 돈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우선 부양책에서 갈렸다. 코로나19 이후 이제까지 약 17조달러가 경제와 일자리를 지키는 데 투입되었는데, 그중 오직 14% 정도만 개발도상국에 사용되었다. 부양책은 부자 나라의 얘기인 것이다. 경기부양책에 국내총생산(GDP)의 1%를 투입할 때마다 노동시간 손실을 평균 0.3% 정도 줄이는 것으로 추산되었으니,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일자리 회복 격차는 ‘뻔히 보였던 길’이었다.

부양책이 어렵다면, 백신 도입에서 회복의 동력을 찾을 수도 있었다. 접종률이 높아지면 방역조치도 완화되면서 생산과 소비 활동이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선진국의 백신 접종률이 60%에 이르는 동안,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가는 10%의 문턱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백신 접종률을 10%포인트 높이면, 노동시간 손실을 1.9% 정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백신 제국주의’는 은유적 표현이나 메타포가 아니라, 수억명의 삶에 고통스럽게 각인된 현실이다.

여기에 이젠 물가 걱정까지 겹쳤다. 세계 공급망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의 회복이 더뎌지면서, 선진국으로의 물자 조달이 어려워졌다. 공급이 줄고, 조달 시간과 비용도 늘었다. 전자제품부터 에너지까지 모두 들썩거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자전거를 못 구한다고 난리고, 크리스마스 때 칠면조를 어찌 구할지 고민이다. 코로나19로 선진국의 생산은 줄고 부양책 덕분에 소비 수요는 강하게 버티고 있으니, 나라 밖에서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세계 공급망은 개발도상국의 고통을 선진국으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고통 전달망’이 되었다.

임금 상황도 만만치 않다. 선진국 경제는 뚜렷하게 회복했지만, 노동시장을 떠난 노동자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언제 돌아올지 날 선 논쟁은 계속되지만, 사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떠난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돌아올 날을 파악하기 힘들다. 실업은 확연히 줄어들지만 고용 회복은 더디다. 그래서 난리다. 구인난, 임금 폭등, 이에 따른 물가 대란. 친숙하지만 무시무시한 말들이 오간다. 물자 부족과 사람 부족으로 시작된 인플레이션이지만, 곧 화살은 임금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의 또 다른 균열도 멀지 않다.

사실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매년 바닥을 갱신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올해 50%만이 민주주의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다행히 권위주의적 체제를 선호한다는 응답 비율은 13%에 그쳤지만, 25% 이상이 어떤 체제든 상관없다고 했다. 당혹스러운 정치적 ‘실용주의’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문제가 많긴 해도 민주주의가 최고라고 했던 비율이 80%였는데, 지금은 60%를 겨우 넘긴다. 민주주의의 신세가 간당간당하다.

이런 걱정이 아프리카로 건너가면 이미 총칼의 문제다. 올해 아프리카에서는 20년 만에 가장 많은 쿠데타가 발생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무능과 비리로 무너지고 있다. 시민들은 정부의 붕괴에 항거하지 않고,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와 쿠데타를 환영하기도 한다. 선진국의 기자가 왜 그런지 물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우리가 매일 요구해도 물과 전기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정부는 도대체 뭘 하는가.” 백신이나 일자리는 심지어 ‘사치스러운’ 사안이다. 또 다른 전염병, ‘쿠데타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세계는 지금 갈림길에 섰다. 작년에 부자 나라들이 코로나19 앞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연대의 맹세를 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거기에 수억명의 삶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헛된 맹세’를 떠올리고 또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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