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雪山을 오르며
“한라산에 눈에 내렸어!” 이른 아침, 제주에 사는 친구가 상고대 사진과 함께 모처럼 근황을 전해왔다. 11월인데 눈이? 뉴스를 보니 전국 산간지대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첫눈이 여느 해보다 평균 한 달 빠르게 찾아온 것이다. 기상이변의 징후인지라 한편으로는 쓸쓸했지만 그래도 첫눈이란 어김없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어느새 한 걸음 성큼 우리 곁에 온 겨울을 실감하며 생각은 자연스레 눈 내린 산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고산 등정을 하는 산악인들이 ‘흰 산’이라 부르며 가슴에 품고 사는 만년설의 히말라야. 10년 전, 스물일곱 살의 내가 히말라야를 꿈꾼 가장 강렬한 이유 중 하나도 ‘눈(산스크리트어 hima)의 거처(laya)’라는 그 산의 이름 때문이었다. 하얗게 눈이 쌓인 그 산을 오래도록 걷고 싶었다.
그리고 염원하던 히말라야를 걸었다. 해발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 위에 눈이 내렸다. 사방은 하얗게 지워졌다. 나무도, 바위도, 흙도, 계곡도. 이 세계에 나만 남고 모든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하얀 산길 위로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생각은 과거로 가기도, 미래로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춥고 힘들다’는 감각과 함께 빠르게 현재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일, 인간관계, 미래 등에 관한 사사로운 고민들이 조금씩 정리되면서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삶의 가닥이 잡히기도 했다. 산과 함께하는 삶, 계속해서 산을 오르고 산에 대한 글을 쓰는 삶. 부단히 만물을 지우던 눈은 세상사로 복잡하게 적체되어 있던 내 마음을 말끔하게 지워줬다. 허공에 흩날리던 눈이 마치 지우개 가루 같았다. 보이지 않을수록 보이는 것, 쌓이면 쌓일수록 비워지는 것이 설산에 있었다. 눈 덮여 모든 것이 가려진 길에서 비로소 그 무엇도 아닌 나를 볼 수 있었다. 이번 겨울에도 고요히 설산을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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