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일제와 주 120시간

한겨레 2021. 11. 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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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재단에서 ‘주4일제 로드맵과 신노동법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숨&결] 이주희ㅣ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연일 ‘톰과 제리’ 추격전 같은 대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개성이 강한 제리와 사과를 좋아하는 톰의 대결이 아니라, 주 4일제와 탄력근로제 등에 기반한 주 120시간과 같은 정책 대결을 보도해준다면 좋겠다. 노동시간에 대한 이 두 입장은 극단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반영한다.

주 120시간은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기적은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땀 때문이라고 한 논평을 생각나게 한다. 근면한 노동이라는 인풋이 성장이라는 아웃풋을 정비례적으로 만들어낼 것이라는 굳건한 신념에 기초한다. 단순한 논리인 만큼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미국 노동총동맹(AFL)의 창시자 새뮤얼 곰퍼스가 말했듯이, “단 한명이라도 실업자가 있다면 그 나라의 노동시간은 너무 긴 것이다”. 누군가의 장시간 노동은 또 다른 누군가의 단시간 불안정 노동이다. 또한 통상 시간제 노동은 여성과 청년과 같은 노동시장의 소수자에게 집중된다. 장시간 노동자는 시간이 없어서, 또 시간제 노동자와 실직자는 돈이 없어서 총수요 촉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출생의 원인이기도 하다. 돌봄, 자원봉사, 시민 참여 등 의미 있는 사회활동이 위축되며, 재충전의 기회가 줄어 인적자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이 낮아지고 소득 양극화도 심해지며 성 불평등도 악화된다.

그래서 적어도 노동시간을 연구하는 학자들 내에서는 이 대결의 승자가 명백하다. 주 4일제가 더 나은 정책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노동자의 표가 고용주의 표보다 훨씬 많을 터인데 왜 선거에는 그 비율대로 반영되지 않을까.

우선, 저임금은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을 선호하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노동운동이 주도한 노동시간 단축은 충분한 휴식과 여가 확보뿐 아니라 기술발전으로 인한 실업을 막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가 아직도 위계적이고 집합적인 고용관계의 개념에 기초한 반면 실제 사회에서는 아웃소싱과 하청, 그리고 플랫폼 경제에서의 위장된 자영업자가 범람하는 상태에서는 주 4일제의 좋은 일자리 창출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정규직 노동자가 주 4일제의 혜택을 누리는 대가로 사쪽이 더 많은 노동자를 노동법 밖의 개인사업자 형태로 계약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 불평등도가 높은 업종일수록 원하는 것 이상으로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된다는 연구도 있다.

이처럼 불평등한 상태에서는 정규직이라고 방심할 수 없다. 장시간 노동은 고용주에게 승진할 가치가 있는 노동자라는 핵심적인 신호이다. 가사와 육아의 부담으로 이런 신호를 보내기 어려운 여성에게 유리천장이 드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시간 단축은 또한 사쪽의 과도한 탄력근로제 활용 요구를 수반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불평등한 가사노동 분담으로 인해 한시적으로도 장시간 노동을 시도할 수 없는 여성에게 불리하다. 이처럼 노동시간은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 규범에 의해서도 영향받는다. 장시간 노동은 그 자체가 다차원적인 불평등의 근원임과 동시에, 바로 그 불평등으로 인해 더욱 고치기 어려운 제도인 것이다.

이번 대선의 승자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될 청년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주 4일제는 갈등을 줄이고 성평등을 촉진할 수 있는 여성친화적이며 동시에 남성친화적인 정책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얻으려면 주 4일제의 효과를 상쇄하는 치명적인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다양한 조세, 사회보장, 노사관계, 교육훈련, 공공주택 정책들이 수반되어야 한다. 돌봄과 공동체를 위한 활동보다 유급노동에 쓰이는 시간의 가치가 항상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평가되어온 우리 사회에서, 주 4일제가 청년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교한 제도 설계와 소통 노력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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