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의 헌법적 책임을 고민한다

한겨레 2021. 11.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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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세상읽기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

2021년 10월28일, 헌법재판소가 임성근 전 판사에 대한 탄핵심판 청구를 각하했다.

국회는 2021년 2월4일 임성근 판사에 대하여 탄핵 소추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임성근 판사는 임기 만료로 퇴직했다. 6인의 헌법재판관들은, 탄핵은 공직 박탈을 의미하는데 임성근 전 판사가 퇴직하여 판사가 아니게 되었으므로 판사직을 박탈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탄핵심판을 각하(종료선언 포함)했다. 임성근 전 판사의 재판개입이 헌법 위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고자 임성근 전 판사의 재판개입에 대한 판결문을 정독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듯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임성근 전 판사의 재판개입은 모두 그가 형사수석부장판사일 때 행해졌다. 형사수석부장판사는 형사재판부의 사법행정을 총괄하며 판사들의 인사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보직이다. 그는 형사재판장들을 집무실로 불러 판결 이유의 수정을 제안하거나 특정한 재판 진행을 요청하거나 이미 내린 결정의 번복을 유도하는 조언을 했다. 그 사안들은 모두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에 대해 임성근 전 판사는 친분이 있는 몇몇 판사들에게 동료·선배 판사로서 조언을 건넸을 뿐 상급자의 지위에서 재판에 개입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임성근 형사수석부장판사로부터 재판에 관한 조언을 받은 뒤 이를 자신의 재판에 반영한 판사들은 당시 형사수석부장판사의 행위를 부당한 재판개입이나 지시로 인식하지 않았고 그 조언 등을 따라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도 않았으며 단지 그 조언 등이 옳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이를 재판에 반영하였다고 진술했다. 그 진술들은,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동료이자 선배 판사로서 보다 나은 해법을 조언하거나 정치권 및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취지로도 읽혔다. 임성근 전 판사의 재판개입에 관해 진행된 형사재판에서는 1심에 이어 2심까지 범죄라고 볼 순 없다고 판단했고, 징계 절차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의 징계인 견책이 내려졌다. 여기에 더하여 다수의 헌법재판관들은 재판개입에 관한 위헌성 판단을 하지 않고 심판을 각하하였다.

모든 상황이 임성근 전 판사의 재판개입을 ‘위헌적인 재판독립 침해’보다는 ‘선배 법관의 다소 부적절한 조언’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모양새를 만든다. 그럼에도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재판하다가 생긴 의문점에 대해 동료 판사들과 토론하는 것과 (사실상의) 인사권자가 먼저 나를 불러 이미 작성을 마친 판결의 수정을 제안하거나 특정한 재판 진행을 부탁하는 것을 어떻게 같다고 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동료들과의 토론은 내 생각을 정리하는 수단이 되지만 수석부장판사의 조언은 이미 정리된 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터이다. 수석부장판사의 조언을 따를 것인지 재판부가 별도로 판단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그 조언이 수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재판의 독립이 침해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식의 판단도 납득할 수 없다. 입증이 불가능한 재판부의 내심의 의사를 기준으로 재판독립 침해 여부를 따지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그것보다는 재판부로 하여금 이미 결정한 재판 사안을 바꿀 것인지 고민하도록 만들었다는 점 그 자체가 문제 아닌가. 재판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조언이든 지시든 재판의 변경이라는 관점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점은, 수석부장판사가 판사들을 불러 재판에 관한 ‘조언’을 건넬 때 판사들이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일까.

조언과 재판개입 사이에서 어지럼을 느낄 때, 탄핵심판에서 3인의 헌법재판관들이 낸 의견을 하나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법관의 헌법적 책임에 관한 헌정사상 최초의 판단이다.

“임성근 전 판사는 판사들의 인사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석부장판사의 지위에서 관료화되고 수직적인 사법행정체계를 이용하여 조언이나 의견제시, 충고 등의 형태로 재판에 반복적으로 개입했다. 사법행정권자의 반복적인 재판개입은 재판독립 침해가 일상적으로 행하여졌다는 강한 의심을 불러와 법원의 재판이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국민의 사법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임성근 전 판사의 재판개입은 재판독립을 침해한 중대한 헌법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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