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싸우는 인간의 탄생

한겨레 2021. 11. 1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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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칼럼]억압과 통제가 싫어서 제도 바깥으로 끊임없이 탈주하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꿔 제도 안으로 난입한다. 철로로 내려가 지하철을 막고 도로로 뛰어들어 버스를 세운다. 자신을 밀어내는 세상 속으로 불청객처럼 들이닥치는 것이다.

홍은전ㅣ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열아홉살 경석은 클래식 기타를 좋아했다. 기타 서클에서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학교는 1년에 200일쯤 지각을 했다. 학교 담장을 넘다 걸린 어느 날 지각의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경석이 대답했다. “방구들이 따뜻해서 엉덩이를 뗄 수가 없었습니다.” 엉덩이가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돌아온 아들을 보며 어머니가 통곡을 했다. 대학생이 된 1979년, 남학생들은 머리를 깎고 군사학교에 입소해 1주일간 병영훈련을 받아야 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입소를 거부하며 군부독재에 저항했다. 경석도 입소를 거부했는데 이유는 장발을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깎지 않고 입소한 그를 보고 교관이 냅다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경석도 ‘에잇!’ 하며 도망쳐버린 것이다. 입소를 거부하면 강제로 징집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꼴통이라고 불렀다.

해병대 제대 뒤엔 하늘을 날고 싶어서 행글라이딩을 했다. 1983년 어느 날 그는 토함산 정상에 서 있었다. 힘차게 이륙에 성공했다. 발아래 펼쳐진 장관을 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 것도 잠시, 그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교회에 가자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나온 일요일이었다. 62살의 경석이 말했다. “엄혹한 시절이었는데 내 주변엔 스포츠와 음악을 좋아하는 낭만주의자들만 있었어. 담치기가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었지. 지각하면 담 넘어 들어가고 수업 듣기 싫어지면 담 넘어 도망치고. 그저 친구들과 놀기 좋아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어.”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격렬했던 그의 인생 전반전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18년이 흐른 2001년 2월 한무리의 사람들이 서울역 철로를 점거했다. ‘빵~’ 하는 경적과 함께 멈춰 선 전동차의 불빛이 어두운 선로를 비추자 휠체어를 탄 마흔두살의 경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한 참사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한국 사회라는 역사의 무대에 중증장애인이 충격적으로 등장한 첫 순간이었다. 경석은 장애인이동권연대를 만들어 투쟁을 이어나갔고 2007년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조직해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탈시설 운동 등을 펼쳤다. 2012년엔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5년간 농성을 했고 현재는 국회 앞에서 탈시설지원법과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

나는 장애운동가들의 생애를 기록 중인데 이렇게 인생의 전반전과 후반전이 극단적으로 다른 이야기는 드물다. 요즘 삶의 화두는 뭔가요? 최중증장애인의 탈시설 문제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은? 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개 쟁취! 뭐 이런 식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하지. 어떻게든 개인적 이야기를 끌어내보려던 노력이 모두 실패하고서야 나는 이 운동이 그에겐 인생 그 자체임을 받아들였다. 투항하듯 그에게 지난 20년에 걸친 장애인 운동의 역사, 아니, 경석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그러자 비로소 한 인간의 기쁨과 욕망이 보였고, 그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억압과 통제가 싫어서 제도 바깥으로 끊임없이 탈주하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꿔 제도 안으로 난입한다. 철로로 내려가 지하철을 막고 도로로 뛰어들어 버스를 세운다. 자신을 밀어내는 세상 속으로 불청객처럼 들이닥치는 것이다. 전반전의 목표가 자유라면 후반전의 목표는 평등, 전반전의 생존 기술이 담치기였다면 후반전의 그것은 점거와 농성이다. 경석은 그런 방식으로 많은 제도를 만들어왔지만 그가 정말로 바라는 건 제도 안의 한자리가 아니라 경계를 뒤흔드는 것이다. 누가 한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규정해 격리하는가. 무엇이 한 인간을 능력 없는 존재로 낙인찍어 추방하는가.

그는 나에게 자신이 꿈꾸는 혁명에 대해 3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설명했다. 이 전장의 전사들은 콧줄을 낀 최중증장애인이고 이들의 무기는 발달장애인들이 제멋대로 추는 춤과 알아듣기 힘든 노래, 전선의 이름은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이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는 놀이터에서 충분히 놀고 집에 가는 어린애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늦은 밤까지 기타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열아홉의 경석이도 그런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친구와 음악과 바다와 하늘의 그 경계 없는 자유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자였다. 2001년 그가 평등을 외치며 지하철을 가로막으면서 등장한 그 사건은 마치 정의로운 인간의 탄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엄마 말 안 듣던 그 꼴통 경석이가 다시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하철 경적과 함께 후반전이 재개되기까지, 그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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