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이 동남풍을 만났더라면..이라크전서는 천운이 따르기를[최규섭의 청축탁축(淸蹴濁蹴)]

조남제 2021. 11. 13.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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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주유에게 약속했다. 하늘에 빌어 동남풍을 일게 해 화공계(火攻計)를 성공시키겠노라고 다짐했다. 주유는 반신반의했다. 북서풍이 부는 초겨울에 때아닌 동남풍이라니 믿고 싶었으나 또한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한 날, 신묘하게도 정말 동남풍이 불었다. 동남풍이 인 데 힘입어 중국 전쟁사 가운데 가장 극적 승리로 평가받는 화공법이 연출됐다. 조조가 이끌던 위의 100만 대군은 촉과 오의 연합군의 화공계를 필두로 한 연환계(連環計)에 휘말려 하릴없이 스러져 갔다. 위-촉-오 삼국이 솥발처럼 벌여 서는[鼎足·정족] 형세가 필연적으로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적벽대전이었다.

제갈량은 과연 하늘에서 동남풍을 빌려 왔을까? 아니다. 소설적 허구다. 제단을 쌓고 기도해 신비스러운 색채를 가미한 작가(나관중)가 빚어낸 상상의 나래일 뿐이다. 천문 지리는 물론 적벽 부근의 지형과 게절 및 기후 변화에 능통했던 제갈량은 동남풍이 이는 시기를 알고 있었다. 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를 꿰뚫었던 제갈량만이 부를 수 있었던 동남풍이었다. 곧, 천시(天時)를 알았기에 운용이 가능했던 방책이었다.

스포츠계에서도 천운(天運)은 널리 쓰인다. 이 맥락에서 나온 말이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대장정이 펼쳐지는 페넌트 레이스에서 우승하려면, 기술(30%)보다 운(70%)이 훨씬 필요하다는 표현이다. “일은 사람이 꾀하나, 그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謀事在人 成事在天].”라는 격언도 천시 또는 천운을 강조함과 그 일맥이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천운이 따르지 않았던 UAE전, 그러나 월드 스타 풍모 돋보였던 몸놀림

손흥민(29·토트넘 홋퍼스)은 군계일학의 월드 스타다. 그가 태극 건아로서나 프리미어리거로서나 펼쳐 보이는 빼어난 몸놀림에, 팬들은 ‘손흥민의 바다’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질풍 같은 드리블을 바탕으로 한 폭발적 슈팅은 이제 손흥민의 전매특허로서 자리하며 세계 으뜸의 비기가 됐다.

단 한판이면 충분했다. 손흥민이 대한민국 팬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왜 세계 축구계에서 절찬받는 톱클래스 스타인지를 깨닫는 데 말이다. 2022 FIFA(국제축구연맹)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A조 5라운드 한국-UAE(아랍에미리트연합)전(11일·고양)은 손흥민의 진가가 다시 한번 여실히 나타난 경기였다.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其疾如風·기질여풍], 움직임은 우레와 벼락 같다[動如雷震·동여뇌진].”(『손자병법』) 병가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손자는 약 2,500년 뒤 손흥민의 플레이를 예견했을까? UAE전에서, 손흥민의 몸놀림은 바람과 우레와 벼락을 연상케 했다.

압권의 움직임은 전반 44분이 막 지나갈 때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우리 진영에서, UAE의 패스를 끊은 손흥민은 질풍 같은 드리블을 시작했다. 상대 진영 페널티 박스까지 50여m를 종으로 횡으로 내달리는 손흥민을 UAE 수비진 5명이 앞에서 막아서고 뒤에서 달라붙었다.

그러나 손흥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쾌속의 진군이었다. 수비진을 훌훌 털어 내며 아크 서클 가운데로 파고들어 벼락같이 터드린 그의 슛은 호쾌하게 날아갔다.

아까웠다. 몸을 날린 GK 알리 후사니를 비웃듯 꿰뚫고 골문으로 비행하던 공은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왔다. 야속하게도 신은 마지막 순간에 등을 돌렸다.

아쉬움은 홀로 오지 않았다. 후반 30분 또 한 번 손흥민을 외면했다. 김진수의 크로스를 받아 문전 정면에서 터뜨린 헤더가 이번엔 크로스바에 맞았다. 영락없이 ‘골이다!’를 느꼈던 순간이었으나, 이번에도 골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 경기에서 두 번씩이나 골대를 때렸으니, 지독한 불운에 시달린 손흥민이었다.

그러나 팬들은 흡족했다. 비록 골로 이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손흥민이 내뿜은 가공할 공격력을 보면서 전율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온 힘을 다하려는 그의 절실한 마음가짐이 뚜렷하게 엿보여 더욱 그런 마음이 들도록 했다.

손흥민은 골과는 손을 맞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한두 단계 높은 솜씨는 팀 전력 극대화의 단초가 됐다. UAE 수비진이 온통 손흥민에게 쏠림으로써 그만큼 다른 공격 전술이 효용적으로 먹혀들었다. 비록 한 골밖에 터지지 않았으나, 팬들이 눈 호강을 누릴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귀중한 1승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업 완성을 눈앞에 뒀다. 막 반환점을 돈 최종 예선 A조에서, 한국은 2위(승점 11·3승 2무)로 1위 이란(승점 13·4승 1무)과 함께 본선 티켓 획득이 유력해졌기 때문이다. 3위 레바논(승점 5·1승 1무 2패)과는 6점 차다. 후반부 레이스에서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각 조 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 티켓 획득에 성큼 다가선 상태다.

이번 최종 예선에서, 한국의 구심점인 손흥민의 활약은 무척 대단하다. 두 골을 터뜨려 팀 득점(5골)의 40% 비중이다. 두 골 또한 매우 순도가 높다. 3차 시리아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극장골로 승리(1:0)의 마지막 한 점을 찍었다. 4차 이란전(1:1 무)에선, 후반 3분 12년 만에 국가대표팀의 테헤란 원정 골을 터뜨렸다. 2009년 6월,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은 뒤(1:1 무) 열리지 않던 테헤란 원정 골문이었다.

홈 UAE전에서, 손흥민은 따르지 않는 천운에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골로 마무리 짓지 못해 주장으로서 동료들에게 미안한 심정일 뿐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한다. 성실한 손흥민에게 걸맞은 우리네 속담이다. 어린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아온 손흥민의 적극적 삶의 자세를 신이 마냥 모른 척할 리 없다. “운도 실력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천운을 누릴 마땅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손흥민이다. 당장 오는 17일(한국 시간) 6라운드 이라크전(도하)에서 다시 골맛을 볼 손흥민이 되리라 기대한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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