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어떤 역병도 인류의 진보 막지 못한다

김유태 2021. 11. 12. 17: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둠, 재앙의 정치학 / 니얼 퍼거슨 지음 / 홍기빈 옮김 / 21세기북스 펴냄 / 3만8000원
`둠, 재앙의 정치학`을 출간한 세계 최고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 그는 책에서 "역병도 진보를 멈추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매경DB]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유년시절 동아프리카에서 '둠(doom)'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둠'은 스프레이 살충제 라벨에 상표명으로 적혀 있었다. 둠의 어원을 파고들며 고대 영어, 고대 색슨어, 고대 북유럽어를 살피니 둠은 '다양한 종류의 끔찍한 고통이 따르는 판결'을 의미했다. '둠'이란 단어엔 어딘가 파멸적이고도 판결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시간이 흘러 2021년, 삶과 죽음을 가르는 '파멸의 질병' 코로나19 비명 속에서 퍼거슨은 묻는다.

'왜 어떤 사회와 국가는 재난에 더 잘 대응할까. 왜 어떤 나라들은 무너지고, 대부분의 나라는 버텨내며, 소수의 나라들은 더 강국이 되는가.'

재앙은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증명하는 대작이 나왔다. 전작 '광장과 타워' 이후 2년9개월 만에 출간된 저자의 신작이다. 지구적 재앙의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에게 전염병의 단순한 역사를 넘어 정치가 잉태하는 재앙의 이면, 아울러 그 해법을 사유한 책이다. 자연적 재앙과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 그 위에서 건설된 인류 진보와 발전의 역사를 향해 질주한다.

먼저 인류가 건너온 '죽음의 풍경'이 차례로 전시된다. 인류는 이제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종교의 영향력은 과학에 밀려 줄어들었고, 의학이 허락한 수명은 과거보다 늘었다. 그러나 매년 5900만명이 사망한다. 망자의 수치를 일 단위로 쪼개면 세계에서 하루 16만명쯤 죽어 나간다. 개별적 죽음은 비극이지만 인류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시대를 우리는 산다. 인간은 종교와 종말론이 사라져 가는 자리에서 '종말을 초래하는 위험이 상존하는 시대'를 제 손으로 일구며 산다. 코로나19는 이런 시기에 발생한 종말을 연상시키는 대사건이었다.

왜 그런가. 들불 같은 전염병 대유행은 인공적이었다. 전염병 자체의 위협이 아닌, 고도로 연결된 네트워크가 이 질병을 키웠다. 전염병은 네트워크에 힘입어 기하급수적으로 전파됐다. 네트워크의 밀도가 확산을 불러일으켰다. 네트워크는 한시도 정지 상태로 있지 아니하고, 복잡계 그 자체인데 다른 네트워크와 상호작용까지 일으키며 전염을 가속화했다.

네트워크에 기생한 코로나19는 본질적으로 '인공적 재난'에 가까웠다. 대학원생 시절인 1982년 함부르크 콜레라 사태를 연구한 이후 '역사에서 질병이 차지하는 역할'에 항상 관심을 가져 왔다고 털어놓는 저자의 문장은 재난 위에서 다시 쌓아올릴 '정치의 새 얼굴'을 발견해 내려는 집념에 이른다. 저자는 코로나19의 본질에 관한 몇 단계 사유를 이어간다. 첫째, 전염병의 과도한 사망률은 항상 인간 행위자들의 작용과 함수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자연적 재난과 인공적 재난의 이분법은 성립할 수 없다. 둘째, 신체의 전염은 정신의 전염과 파괴적인 상호작용을 맺는다. 셋째, 재난이란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한다.

불확실성이란 바로 그 모호한 특성으로, 인간의 정신과 길항하는 육신의 재앙을 정치는 해결할 수 있을까. "민주적 제도가 모든 재난의 안전장치는 아니다"고 저자는 힘주어 답한다.

역사 속에서 그런 사례는 무수했다. 대의제 정부가 가장 먼저 나타난 영국의 경우를 보자. 런던 시민은 템스강 인근 제조 공장과 난방·요리를 하는 가정에서 대규모로 땐 석탄 때문에 강한 독성의 농무(濃霧)에 시달렸다. 이후 1853년 도심에서 연기발생저감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이후 런던에서 툭 하면 발생하는 최악의 스모그 사건을 막지는 못했다. 그뿐인가. 인류가 벌인 20세기 전쟁은 또 어떤가. 전사한 영국인 수는 스모그로 인한 사망자를 뛰어넘었다. 민주주의는 질병도 전쟁도 예방하지 못했다는 결론은 수치와 사기의 유물론으로 증명된다.

미·중 패권 경쟁은 예정된 재앙의 실사판에 가깝다. 저자는 오늘날의 세계 정세를 '제2차 냉전(冷戰)'으로 본다. 냉전이 재연되는 시기에 발생한 코로나19는 미국이 주도하던 정치사회 시스템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고, 양국 냉전을 촉발시켰다. "달러의 몰락"(레이 달리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실패와 아시아의 세기"(웨이드 데이비스)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전망이 비관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흑사병이 1348~1665년 사이에 반복해 런던을 덮친 것처럼 코로나19는 장기화돼 인류는 새 변이에 고통받겠지만 역병이 충격하는 대상은 위기에 빠진 인류가 아닌 '위기에 대처하는 데 실패한 국가 관료 조직'이라고 저자는 예견한다. 저자가 믿는 건 재앙을 돌파하는 역사의 유구한 진보다. 이를 확인하고자 책은 고대 로마의 폼페이, 중세의 페스트, 현대의 체르노빌을 거쳐 코로나19 대유행에 이르기까지, 이 가운데 벌어진 챌린저호 폭발사고, 에이즈 확산, 독감과 에볼라 전염의 현장을 시간도 잊고 종횡무진하며 렌즈를 들이댄다. 진보는 그것이 진행되는 한 역병으로 멈추는 법이 없었다고, 어떤 병원체도 역사의 진보를 막지 못했다는 결론이 750쪽짜리 벽돌책에서 아름답게 기술된다.

재앙은 다시 발생할까. 저자에 따르면 앞으로 재앙은 허수가 아닌 상수(常數)다. 시스템은 불완전하고 인간은 늘 실수한다.

그러나 저자는, 재난 뒤에 남겨지는 인간은 비록 약해질지언정 살아남는다는 점과 재난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해지는 자가 새 시대의 강자가 됨을 분명히 한다. '회복재생력'에 관한 저자의 서술 부분은 가장 눈여겨 읽어볼 만하다. 헨리 키신저의 어구를 인용하며 저자는 나약해진 인류에게 희망을 건넨다. "실패는 반전을 위한 입장권이다." 책은 섣부른 장밋빛 대신 냉철한 잿빛 위에서 건설되는 인류의 내일을 소묘한다.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