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헬조선’과 ‘영끌’… 둘 중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2021. 11.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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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권 때 나온 신조어 ‘헬조선’
투덜대면 나아질지 모른다는 기대 섞인 표현
집값 폭등 현 정권서 나온 유행어 ‘영끌’
생존 위협받는 절박함과 위기감의 표출
생존마저 걱정하게 하는 정부 있었던가
‘불평할 수 있는 사치’ 돌려줄 지도자 기다린다

내년 대선 후보들이 하나같이 ‘비호감’이라거나 ‘차악(次惡)’을 골라야 한다는 말이 많아 나도 한번 이런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당신은 ‘헬조선’과 ‘영끌’ 중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먼저 단어의 뜻부터 짚고 넘어가자. ‘헬조선’이란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朝鮮)의 합성어로, ‘한국이 지옥에 가깝고 전혀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의미의 인터넷 신조어다. 2010년 1월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에서 처음 등장한 후 주식갤러리로 옮아가는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주로 사용되다가 SNS로 퍼지고 언론에서 보도하면서 널리 쓰인 단어다. 빅데이터 분석 업체에 따르면 2015년 블로그와 트위터에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노출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2017년까지 이어졌다가 지금은 잠잠해졌다. 근접 단어로는 금수저, 흙수저 등이 있다.

‘영끌’이란 ‘영혼까지 끌어모으다’를 줄여 부르는 신조어로, 자산이나 연봉같이 금전적인 것부터 남성의 근육 펌핑, 여성의 가슴 볼륨에 이르기까지 부족한 것을 부풀리려고 안간힘 쓰는 모습을 희화화하는 표현이다. 원래는 예능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나온 부동산 대책으로 LTV 규제가 강화되어 대출이 어려워지면서 대출을 영혼까지 끌어모아서라도 사야 한다는 일명 ‘영끌 수요’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자산 관련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근접 단어로는 ‘패닉 바잉’ ‘빚투’ 같은 단어가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도긴개긴이라 선택이 어렵다면, 다음 부연 설명을 읽어보자. ‘헬조선’은 박근혜 정부 때 단어다.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는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느냐는 국정감사 질의에서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고,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를 배워서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한다”고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일 축사에서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를 의식해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하고 있다”며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고 말했으나,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왜 박근혜 정부에서 나타났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영끌’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대책들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이 거의 불가능해질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자 빚을 내서라도 부동산이나 주식 등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다룬 기사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30대가 영끌해서 샀다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이 단어를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 30대는 2020년 들어 서울의 아파트를 가장 많이 산 세대다. 주택담보대출도 30대가 가장 많이 받았으며, 자산 대비 부채 비율도 상승했다.

헬조선 논란은 사실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탈북자 강새벽이 깨끗하게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강새벽이 지옥 같은 게임에 참가한 이유가 ‘엄마를 북에서 데려오고, 제주도에 가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진짜 지옥은 오징어 게임도, 대한민국도 아니었다. 한편 ‘영끌’은 현재 진행형으로, 30대의 부동산 영끌 문제가 지금까지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자, 이제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모든 단어에는 정향성(orientation)이 내재되어 있다. 두 단어 모두 청년들의 상실감을 담은 단어로 살기 어렵다는 뜻은 공통이지만 ‘헬조선’과 ‘영끌’은 단어가 지닌 에너지의 방향이 다르다.

‘헬조선’이란 뭔가에 불만족하여 자신의 처지를 투덜대는 불평 모드에서 나온다. ‘불평러’들은 원래 천성이 그런 사람, 분노가 많은 사람,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도구적으로 불평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생산적인 ‘불평러’인 마지막 부류는 전체 불평러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나, 어쨌든 불평은 뭔가 투덜대면 상황이 나아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나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영끌’은 어떤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뭔가를 한다는 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과 위기감의 표출이다. 목숨이 위태롭거나, 재산을 잃을 것 같거나,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 사람들은 불평 모드에서 생존 모드로 스스로를 전환시킨다. 그리고 조용히 살길을 모색한다. 열심히 줄 서서 코로나 백신을 맞거나, 평생 일군 사업체를 현금화하거나, 영원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집을 마련하려고 영혼을 털 듯이. 생존에 진심인 사람들에겐 불평도 사치다.

생각해보면 생존경쟁 아닌 시대가 없었지만 지난 몇 년간 양상은 색다르고 지독했다. 밖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생명을 위협했고, 안으로 정부의 정책은 우리 재산을 위협했으며, 대통령의 뜬금없는 종전 선언은 나라의 안보와 존립을 위협했다. 최근에는 심지어 요소수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힘들게 일군 ‘민주주의’도 거의 빈사 지경이고, 도덕과 예의 염치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문 닫은 가게가 즐비한데 한쪽에선 ‘민관 합동 대박 프로젝트’로 돈벼락 잔치를 벌였다. 지금 정부처럼 집권 내내 생존을 걱정하게 한 정부가 또 있었을까 싶다.

내년 선거는 생존의 기로에서 숨죽이며 평소 특기인 불평도 하지 않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살 궁리를 해온 국민이 ‘모드 전환’을 해줄 지도자를 선택하는 선거다. 정권 교체가 아니라 생존을 갈망하는 선거다. 그래서 불평할 수 있는 사치라도 다시 가져다줄 지도자를 국민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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