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법인카드가 떠난 자리

고재열 여행감독 2021. 11.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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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생애 전환 여행’을 도모하다보니 전직 대기업 임원이나 기관장 출신인 분들을 종종 만난다. 한번은 여행지에서 법인카드가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 법인카드를 쓸 수 없게 되면서 강력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법인카드의 사회학’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고재열 여행감독

결제 한도가 큰 법인카드를 쓰던 사람은 흔히 말해 출세를 한 사람이다. 자신의 법인카드로 크게 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접대를 받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법인카드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가 되면 둘 다 불가능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면서 종종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습성은 대접받는 버릇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다. 어떤 분이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교외의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데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았더니 아내가 자신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계산을 하고 있더란다. 법인카드로 쏘거나 아니면 대접받거나, 늘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던 사람에게 생기는 흔한 상황이다.

어느 대기업 임원 출신 멤버는 민폐 캐릭터가 된 전직 임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은퇴 후에 “나는 한 달 골프 약속이 풀 부킹되어 있다”고 자랑하곤 해서 ‘곧 외로워지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1년 뒤에 보니 거의 골프를 끊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전직자에게 계속 접대 골프를 쳐주는 관대한 사회가 아니었다.

남에게 대접받던 버릇은 쉽게 고치지 못하는 반면 쓰는 데는 급격히 인색해진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잘나가던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의 위치가 영원할 것으로 착각해 은퇴 후를 대비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배우자 역시 절실하지 않아 재테크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은퇴 후 낙차가 크다는 것이다.

한 은퇴자분은 “현직일 때는 골프 비용까지 서로 내주던 사람들이 전직이 되어 골프를 치면 캐디피 13만원을 내주려는 사람도 없어서 서로 눈치를 본다”고 말했다. 다른 평범한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연금을 받고 있어도 현직 때 씀씀이 때문에 ‘가난하다’고 느껴 소비성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을 대접하려는 사람도 없고 술자리에서 쏘지도 못하는 딜레마 사이에서 인간관계도 위축되곤 한다.

가장 최악은 대접받던 관성과 훈수 두던 관성이 결합될 때다. 대접은 대접대로 받으면서 잔소리를 하는 자기중심주의는 고독으로 가는 특급열차다. 이렇게 하면 당연히 찾는 사람도 적어진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기억해주는 이들이 모이는 전직자의 모임에 몰리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는 자신보다 ‘꼰대력’이 높은 선배들이 버티고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추억은 아름답다. 하지만 추억만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은 아름답지 않다. 개인카드로 나눠 내면서도 얼마든지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비결은 간단하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면 된다.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사람을 만난다면 누구든 곁을 내줄 것이다.

고재열 여행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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