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어둠의 마법'이 그립다

장강명 소설가 2021. 11. 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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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덕에 집에서 온갖 영화 찾아볼 수 있지만
끝까지 보는 영화는 줄고, 극장 나서며 대화하던 시간도 사라져
영화관의 어둠은 현실 떠나는 마법.. 나는 그 어둠을 사랑했구나

대학 때 교양 수업으로 ‘연극의 이해’라는 과목을 들었다. 학점은 좋지 않았지만 덕분에 연극이라는 세계에 눈뜨고, 대학로에 가서 좋은 작품도 몇 편 봤다. 명계남씨의 1인극 《콘트라베이스》가 기억에 남는다.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극의 정의였다. 연극의 4요소는 희곡⋅배우⋅관객⋅무대다. 나는 관객이 어떻게 연극의 한 요소가 되는지 궁금했다. 강사는 이렇게 설명했던 것 같다. “관객 없는 공연을 촬영하면 그것은 영상 자료이지 연극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대 앞에서 배우를 마주해야만 비로소 한 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알 거 같기도 하고 모를 거 같기도 하네, 그나저나 선생님 저한테 왜 이렇게 학점을 짜게 주셨나요, 그러면서 넘어갔다. 그 설명을 올해 뒤늦게 이해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꼭 2년 전에 빔 프로젝터를 샀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도 가입했다. 아내는 극장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표를 예매할 필요가 없고, 앞사람 머리에 화면이 가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화장실은 언제든 갈 수 있고, 지루한 상영 전 광고를 참고 견디지 않아도 된다.

공교롭게도 얼마 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졌다. 영화 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관객 수는 20년 전 수준으로 줄었다. 많은 영화 팬이 이때 OTT에 가입하지 않았을까 싶다.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행을 택하는 작품도 나왔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극장은 문을 닫았다.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원래도 영화를 그리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더 안 보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끝까지 참고 보는 영화가 줄었다. 집에서 편안히 빔 프로젝터 화면을 볼 때에는, 조금만 지루해지면 궁둥이가 들썩거렸다. 마음껏 맥주를 마실 수 있어서인지, 소변도 더 자주 마려워지는 것 같았다.

다른 관객 신경 쓰지 않고 잡담을 할 수 있어서, “이 영화 이상해”라든가 “연기 진짜 어색하네” 같은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게 됐다. 그런 대화는 “오늘은 그만 보고 내일 마저 보자”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앞부분만 보고 접은 작품들이 생겼다. 범작에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됐다고 반겨야 할 일일까?

함께 영화를 보다 어느 한쪽이 “난 피곤해서 먼저 잘게, 자기 잘 봐”라고 말하며 자리를 뜨면 남은 사람도 감흥이 확 식는다. 그럴 것 같은 영화는 처음부터 상대에게 혼자 보라고 권하게 됐다. 그렇게 영화 감상은 우리 부부에게 데이트 이벤트로서 기능을 더 이상 못 하게 됐다. 극장을 나오며 서로 의견을 묻고 대화하던 시간도 사라졌다.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나서 2년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극장의 어둠을 사랑했다. 아마도 영화 자체보다 더.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잠시의 어둠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함께 현실을 떠나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꿈의 시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지폐와 같다. 참여자들이 모두 그 힘을 믿으면 정말로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객석에서 한 명이라도 휴대폰 화면을 켜고 떠들면 사라지는 힘이다. 극장은 사람들이 그 마법을 믿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제 나는 연극이 제의(祭儀)라던 20여 년 전 강의 내용을 이해한다. 그런데 선생님, 알고 보니 영화도 그랬습니다.

신기술은 새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옛 가능성을 없앤다. 인터넷은 사색을, 책은 구술문화를 없앴다. 메타버스? 그건 우리 삶에서 현실감을 없앨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그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빔 프로젝터의 대가로 내가 놓친 것은 대형 스크린의 스펙터클과 음향 시스템보다 훨씬 소중하고 거대한 무엇이었다.

이달부터 영화관에서 자리 띄어 앉기가 해제됐고, 심야 영화 관람도 가능해졌다. 백신 접종을 인증하면 전용관에서 조용히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표 값에서 6000원을 깎아주는 쿠폰도 발행한다. 다음 주에는 오랜만에 극장을 찾으려 한다. 어둠의 마법을 만끽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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