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26>과학기술처 출범 막후..초대 장관에 김기형 박사

김현민 2021. 11. 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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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 개청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7년 2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김원태 무임소 장관으로부터 과학기술원(가칭) 설립(안)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문홍주 문교부 장관, 이석제 총무처 장관 등 관련 부처 장관들이 참석했다.

김원태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과학기술원 설립(안)은 기획관리실·연구조정실 등 2실, 진흥국·국제협력국 등 2국과 산하기관으로 중앙관상대(현 기상청)·국립지질조사소(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를 두고 외청으로 원자력청을 둔다는 내용이었다.

청와대 보고 보름 후인 2월 23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경제과학심의회의(이하 경과심)도 과학기술행정기구개편(안)을 검토해 그 결과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경과심은 과학기술원은 과학기술 진흥과 개발·이용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며 연구개발 방향 설정, 사후 관리, 조성과 더불어 자원 개발과 외자 도입 기술 검토 및 효율화 등 경제개발에 필요한 기술 지원업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경과심은 과학기술원장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며, 과학기술 개발의 기본 정책과 부서 간 원활한 협조를 위해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과학기술원장과 재무·국방·문교·상공·농림·체신 장관과 과학기술자 7명으로 과학기술위원회를 총리 직속으로 구성할 것을 정부에 제안했다. 경과심은 이 같은 내용을 행정기구 개편에 반영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청와대는 무임소장관실과 함께 경과심 안을 취합해 이석제 총무처 장관에게 최종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총무처가 행정기관 조직과 정원 관리, 정부 인사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총무처는 최종안을 만들면서 과학기술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에 수시로 자문했다.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의 회고.

“총무처가 기술관리국에 과학기술 관련 내용을 수시로 물었어요.”

총무처는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과학기술 행정기구 설치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새 부처의 임무는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통합적인 기본 정책 수립 △시험조사 연구 임무 집행에 관한 종합 조정 △시험 연구시설 운영에 관한 조정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국제 협력 △원자력 연구개발과 활용 방안 수립 및 진행 등으로 정한다.

둘째 새로 설립한 기구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기관 △국무총리 직속기관 △행정 각부의 일부 △원·부·처의 소속기관 △행정부에서 분리 독립한 기구 등 5개 안을 놓고 검토한 결과 새 기구의 중요한 업무가 참모와 계획이란 점을 들어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하고, 원래 안인 과학기술원을 과학기술처로 격하한다.

셋째 새 기구의 조직은 애초 기술관리국이 마련한 안보다 작은 규모로 발족하며, 새 기구는 연구조정실·기획관리실 등 2실과 진흥국·국제협력국의 2국을 두고 원자력원을 청으로 격하해서 과학기술처 외청으로 둔다 등이었다.

총무처를 거치면서 애초 과학기술원(안)에 비해 규모가 대폭 쪼그라들었다. 부총리급 과학기술원은 과학기술처로 격하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 A씨의 설명.

“정부에서 부총리급 부서 신설에 대해 반대가 심했어요. 부총리급으로 하면 기존 부처들과 갈등이 발생한다고 주장했지요. 더욱이 과학기술 관련 연구기관을 넘기는 일도 기존 부처 입장에서는 마뜩하지 않았죠.”

그해 2월 28일 오전.

국무회의는 총무처가 마련한 과학기술처 신설안과 정부조직법률 개정법안을 의결했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과학기술처 설치안은 국무총리 직속기구로 2실 2국을 두고, 원자력청 외청을 두며, 모두 15개과를 두기로 했다.

그해 3월 2일 정부는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안을 국회로 넘겼다. 국회는 3월 4일 이 법안을 소관 상임위원회인 내무위원회에 상정했고, 3월 7일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거쳤다.

그해 3월 10일 오전 10시 국회 본회의장.

이효상 국회의장이 개회를 선언하고 회의를 진행했다.

“정부조직법 중 개정법률안을 상정합니다. 내무위원장 조시형 의원께서 심사보고를 하기 바랍니다.”

◇조시형 의원=정부조직법 중 개정법률안은 1967년 3월 2일 정부가 제안한 것입니다. 과학기술처를 신설하고, 기획관리실과 연구조정관실을 두며, 소속기관으로 원자력청을 개편·흡수합니다. 교통부 소속인 중앙관상대와 상공부 소속인 국립지질조사연구소를 흡수하며,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을 폐지하는 내용입니다. 과학기술처를 원 또는 부로 하는 문제에 관해 소수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효상 의장=다음은 총무처 장관께서 제안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석제 총무처 장관=과학기술처 설치는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고, 산재한 과학기술 업무를 일원화해 종합적인 과학기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이효상 의장=정부조직법 중 개정법률안을 정부 원안대로 가결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가결을 선포합니다.

정부는 그해 3월 30일 정부조직법 중 개정법률을 1947호로 공포했다.

정부가 과학기술처 설치를 공포하자 단연 최대 관심사는 초대 장관 인선이었다. 누가 장관으로 발탁될지를 놓고 하마평이 무성했다. 과학기술계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자천타천으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김기형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을 초대 장관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그해 4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에 김기형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을 임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4월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기형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차관에는 이재철 감사원 감사위원을 임명했다.

초대 김기형 장관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요업공학의 최고 권위자였다.

김기형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65년 5월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해 뉴욕에서 교민들에게 베푼 리셉션 장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귀국해서 1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보고 공업화 보고서를 제출하는 한편 공업화와 행정조직을 정비해 과학기술과 공업화 정책을 담당하는 행정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장관급인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으로 임명했다.

김기형 전 장관의 생전 회고.

“장관에 취임하기 한 달여 전에 행정 경험이 없으니 미국, 영국, 일본 등 외국 사례를 돌아보겠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과학기술처를 설립한다고 했더니 '미국 경제고문이 미국에서도 아직 설치하지 못하는데 한국이 먼저 만든다니 축하한다'고 하더군요.”

이재철 초대 차관은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해 영남대와 서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과학기술처 차관 후 교통부 차관과 인하대·중앙대·국민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조양호 전 대한항공 회장의 장인이다.

그해 4월 21일. 과학기술처 개청식이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정동 옛 원자력원 청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각부 장관, 과학기술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과학기술 없이는 경제성장이나 생활 향상이 이룩될 수 없다”면서 “조국 근대화 작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강력한 과학행정을 실천하고 유능한 과학자들을 우대하는 등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겠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앞서 김기형 장관과 과학기술처 현판식을 가졌다.

김기형 장관은 개청식 후 기자들과 만나 “과학의 생활화와 대중화가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연구 자율성을 존중하고, 과학기술인 처우를 개선하며, 연구시설과 도서관 등을 확충해 과학화 분위기 조성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과학기술처는 출범 후 기획관리실장에 송효정 전 행정개혁조사위원, 연구조정실장에 민수홍 부산대 공대 학장을 임명했다. 그동안 과학기술 행정을 총괄한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은 연구조정관으로 이동했다.

인사와 관련한 후일담 하나.

과학기술처 발족을 2주 앞둔 어느 날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낸 김학렬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화로 전상근 국장을 불렀다.

“전 국장, 이력서 한 장 가지고 청와대로 오시오.”

전상근 국장은 청와대 별관 경제수석비서관실로 들어갔다.

“무척 바쁘겠구먼. 새 부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건 신임 장관님 소관이어서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전 국장을 초대 차관으로 추천할 생각이오.”

전상근 국장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인사 발표를 기다렸지만 승진 인사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의 증언.

“인사를 보니 연구조정관으로 발령이 났어요. 과학기술 행정을 총괄한 담당 국장으로서 인사에 실망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지를 바꿔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그해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가 치열하게 맞붙은 끝에 박정희 후보가 승리했다. 낙선한 윤보선 후보는 전상근 국장 부인의 큰아버지였다. 전상근 국장의 능력이 출중해도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를 차관으로 발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1967년 4월은 과학기술계에 축제의 달이나 다름없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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