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노태우 별세가 소환한 '통석의 념'

김태훈 2021. 11. 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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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訪日때 아키히토 국왕의 발언
사죄보다는 후회에 가까운 표현
독일은 지도자부터 과거사 반성
日에 메르켈 같은 리더 없어 통석

‘통석의 념.’(痛惜の念) 일본어로 매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생각이란 뜻이다. 한국인에겐 퍽 생소한 말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이 어구가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를 계기로 갑자기 소환됐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부고 기사에서 “고인은 1990년 5월 24일 일본을 방문해 궁중 만찬 때 아키히토(明仁) 당시 국왕으로부터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통석의 념을 금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소개한 것이다.

노태우 방일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아키히토의 구체적 발언은 이렇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일제강점기)에 귀국(한국)의 국민들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의 념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체 통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통령 방일에 앞서 일왕의 사과 발언 수위 등을 놓고 일본 외무성과 조율한 최호중 당시 외교부 장관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김태훈 국제부장
“일본이 무슨 저의로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이런 문구(통석의 념)를 애써 찾아낸 것일까. 나는 주한 일본대사로부터 이것이 확정된 일본 측 최종 문안임을 확인한 후 통석의 념이란 잘못을 아픈 마음으로 뉘우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이에 이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런 뜻으로 해석해도 좋다고 양해했다.”

외교부는 일왕의 만찬사 내용을 언론에 전하며 통석의 념이란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의미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국내 반응은 싸늘했다. 애통하고 애석하다는 뉘앙스의 통석은 아무리 잘 봐줘도 ‘반성’보다 ‘후회’에 더 가까운 표현이었다. 한 신문은 “억지 해석으로 사죄를 받은 것처럼 생색을 내려는 작태”라고 질타하며 ‘통석을 애석하게 여김’이란 제목의 사설까지 실었다.

이번에 일본 언론은 현 문재인정부와 달리 노태우정부 때는 한·일관계가 괜찮았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통석의 념을 꺼내든 듯하다. 일본으로선 나름 신경 써 예우했다는 취지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과거사 사과에 인색한 일본의 외곬을 확인하고 씁쓸함을 느낀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요즘 세계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환송 열기가 뜨겁다. 16년 만에 권좌를 떠나는 메르켈의 임기 중 마지막 이스라엘 방문은 의미가 남달랐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 국제사회에 깊은 울림을 줬다.

독일이 처음부터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친 것은 아니다.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가 쓴 ‘전후 유럽 1945∼2005’에 따르면 2차대전 후 독일을 점령한 4대 연합국은 독일인들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견학을 의무화했다. 히틀러 치하에 그곳에서 자행된 끔찍한 학살 등 나치 만행이 담긴 기록영화도 꼭 봐야만 했다. 미관람자에겐 식량 배급표를 안 줬다. 그런데 당시 프랑크푸르트 어느 극장의 풍경을 주트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그들(독일인)은 영화가 시작되자 대부분 고개를 돌렸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사회 전반에 ‘내가 한 일이 아니니까’, ‘나와는 관계 없으니까’ 하는 식의 태도가 만연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부끄러운 행적을 외면하거나 애써 잊으려는 건 인지상정이니까. 독일의 통렬한 과거사 반성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됐다. 콘라트 아데나워, 빌리 브란트, 그리고 지금의 메르켈 등이 앞장섰다. 나치와의 단절을 다짐하고 이웃나라가 입은 상처를 보듬은 그들의 진정성 있는 언행 하나하나가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독일의 국격도 덩달아 올라갔다.

세계 3위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의 총리를 지낸 인물들 중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란 칭송을 들은 이가 한 명이라도 있던가. 일본에는 왜 메르켈 같은 정치가가 없는지 그 점이 애석할 뿐이다.

오는 12월 7일은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 등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이 전쟁으로 겪은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신내각이 어떤 반성의 메시지를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태훈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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