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드라마일 뿐이라 장담할 수 있나

이태훈 여론독자부 차장 2021. 11. 9.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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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열기 살짝 식은 지금 ‘왜 열광했나’ 돌아보면 어떨까
탈북민 방치, 시한폭탄 영끌 투자… 더는 국민을 ‘도박’에 내몰지 말길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인기가 한창이던 지난달 말, 미국 CNN방송은 온라인 기사 ‘왜 미국인은 오징어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가’에서 “미국인들도 매일 크든 작든 자신만의 ‘오징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인공 기훈(이정재)의 어머니가 당뇨 진단을 받고서도 “일을 쉬면 병원비는커녕 집세도 못 낸다”며 치료를 거부하는 장면은 공공 의료보험 체계가 미비한 미국에서 1400억달러(약 165조원)에 달하는 의료비 빚더미 문제를, 파키스탄 이주 근로자의 임금 체불 사례는 미국 내 이민자에 대한 임금과 차별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미국인 자신들의 이야기가 드라마에 겹쳐 보였다는 얘기다.

한 나라의 이야기를 세계적 보편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드라마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연이어 이런저런 기록 속에서 화제가 되는 걸 보며, 이 들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으면 같은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왜 한국인은 오징어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가.’ 이 드라마를 만든 황동혁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첫 시나리오를 완성한 2008년쯤엔 난해하고 기괴해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서글프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잘 어울리는 세상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지나치게 잔인한 첫 게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질려 그만 볼까 싶었다. 하지만 탈북 소녀 강새벽(정호연)의 눈빛이 멱살을 잡아끌듯 끝까지 보게 했다. 그는 중국 공안에 걸려 북송당한 어머니를 빼내 오려고 건넨 돈을 떼먹은 탈북 브로커를 찾아간다. 뜨거운 커피를 끼얹고 목에 칼을 들이댄다. 깡다구만 남은 듯한 깡마른 몸과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살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 그 누군들 새벽만큼 절박하지 않았을까.

지난 3월 북한자유연합 대표 수잰 숄티 여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국에 억류 중인 탈북민을 구해달라’며 보낸 공개 편지를 번역해 본지에 실은 적이 있다. 그는 “6·25 때 구출됐기에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당신이 행동할 때”라고 호소했다. 정부는 무반응이었다. 국제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지난 7월 “중국 정부가 현재 탈북민 등 북한 주민 최소한 1170명을 구금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이들에게 탈북은 목숨을 건 도박과 같았다. 지금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릴 이들의 존재는 너무 쉽게 망각된다.

탈북민의 현실은 눈감으면 안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선물(先物) 투자로 60억을 빚진 ‘쌍문동 수재’ 조상우(박해수)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정도 차이일 뿐, 정부의 정책 실패로 빚어진 부동산 값 폭등 국면에서 더 늦기 전에 집을 사려는 ‘영끌’ 대출과 빚을 내서라도 주식·가상화폐에 투자하는 ‘빚투’는 현실이다. 지난 2분기 말 20~30대 가계 부채는 487조5900억원으로 전체의 27%나 됐다. 증가율도 다른 연령층을 압도했다. 올 상반기 수도권 아파트 매매 거래 중 20~30대가 전체의 3분의 1을 넘었고, 지난해 주요 증권사 신규 계좌 주인 중 절반이 20~30대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건 도박에 내몰리는 드라마가 현실에서 다시 시작된다면, 그건 악몽일 것이다.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부동산 문제는 “여전히 최고의 민생 문제이며 개혁 과제”라고 남의 말 하듯 하는 걸 보며 ‘영끌’ ‘빚투’에 나선 사람들 심정은 어땠을까. 결혼하고 집 사고 아기 낳는 평범한 삶의 꿈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린 위정자들은 어찌 이리 뻔뻔하고 당당한가. 설마 오징어 게임 제작진과 배우들을 불러다 달고나를 해 먹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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