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귀신이 정동극장서 싸운다..승자는?

정혁준 2021. 11. 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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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세월 넘어 첫 근대식 공연 재해석
코로나로 잔여 공연 취소 뒤 6~7일 공연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지난달 27일 저녁 7시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을 보기 위해 30분 전에 극장에 도착했다.

‘소춘대유희’ 뜻이 궁금해 찾아봤다. 웃음이 만발하는 무대에서 즐기는 놀이라는 뜻이었다. 이 작품은 코로나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게 된 국립정동극장 광대(예술단원)들 앞에 100년 동안 공연장을 지키며 살아온 조선시대 광대(귀신)들과 5명의 오방신(극장신)이 찾아와 함께 공연을 벌이는 이야기다.

공연을 보기 위해 기다렸지만 입장이 안 됐다. 보통 공연 시작 전 30분부터 입장이 됐는데, 이날은 계속 지연됐다. 공연 10분을 남겨 두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공연 출연자의 코로나 확진 판정에 따라, 오늘 공연은 취소합니다.”

입장을 기다리던 관객의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관객은 “광주에서 올라왔는데…”라며 당황해했다.

은행나뭇잎이 지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면서 ‘정동극장 귀신들이 코로나에 무릎을 꿇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사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는 정동극장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작품이다.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이 즉위 40년을 맞았다. 대한제국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공연을 준비했다. 현재 정동극장 인근 터에 우리나라 첫 극장인 협률사가 세워졌다. 황실에선 전국 팔도의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춤꾼, 소리꾼 등 예술인을 초청해 공연을 준비했다. 이렇게 모인 예술인만 170여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종 축하공연은 당시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거듭 연기됐다. 그 뒤 협률사는 1908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이를 계승한 게 정동극장이다.

작디작은 세균 콜레라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 코로나에 인간이 다시 무너진 게 씁쓸했다. 반복되는 역사와 연약한 인간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6~7일 정동극장에서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이 재개됐다. 코로나로 공연을 못해 아쉬웠던 현재의 예술단과 콜레라로 공연이 연기돼 슬펐던 120년 전 광대가 다시 힘을 모아 무대를 만든 것만 같았다.

실제 그러했다. 7일 낮 공연에서 코로나로 공연이 취소돼 의기소침한 정동극장 예술단원 앞에 120년 전 콜레라로 야심 차게 준비했던 무대를 미루고 미뤘던 백년광대들과 오방신이 나타났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도포를 입은 정체불명의 한 꼬마도 등장했다. 꼬마는 판소리 <수궁가>의 ‘고고천변’,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비롯해 민요까지 풀어내며 우리 소리를 들려줬다.

무대를 향한 갈증과 고된 기다림을 겪은 이들은 ‘흥’하고 ‘힙’하게 노래와 춤, 연극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연을 펼쳤다. 판소리, 민요, 승무, 바라춤 등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이 어우러졌다. 버나(접시) 돌리기, 줄타기 남사당놀이, 탈놀이, 창극 등도 더했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광대들의 한밤 파티였다.

최근 화제를 모은 춤 경연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엠넷)처럼 선배 춤꾼과 후배 춤꾼의 춤 배틀도 펼쳐졌다. 경연을 위한 춤배틀은 아니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전통이 현대로 이어지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춤사위 배틀이었다.

공연 중간쯤엔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객석을 이어주는 다리가 내려왔다. 이 다리를 선후배 예술인이 지나갔다. 전통을 잇는 모습을 상징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다리에서 첨단 기술을 활용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면이 이어졌다. 홀로그램·딥페이크 등 첨단 무대기술로 명창 이동백이 나타났고, 백년을 거쳐 간 광대 모습도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탄생해 선보였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새벽이 다가오자 광대들은 사라지고, 꼬마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더니 한 노인네의 모습으로 변했다. 노인은 후배 광대들을 위로하며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것이 광대의 역할이자 기쁨”이라고 얘기했다.

아이는 누구일까? 이 작품을 쓴 강보람 작가가 팸플릿에 쓴 ‘작가의 글’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민요와 판소리, 춤과 재주가 한데 섞여 있던 당시 ‘소춘대유희’를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을 온전히 재현할 수 있을까. 연출님과 함께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동백 선생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창극 영화를 준비한다고 열정을 불사르던 선생의 말에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위해 앞으로 나가던 그 모습, 어쩌면 선생은 지금 살아계셔도 그러셨을 겁니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공연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고종 때 전국에서 모인 소리꾼, 춤꾼 등은 끝내 축하공연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축하공연 대신 유료 공연을 선보이며 그들의 재기를 뽐냈다. 1902년 12월 협률사에서 판소리, 탈출, 무동놀이, 땅재주, 궁중무용 등을 선보인 <소춘대유희>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첫 유료 공연이었다. 국립정동극장의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는 120년 전 협률사에서 펼쳐진 이 공연을 토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고 있다.

은행나뭇잎이 지는 덕수궁 돌담길을 다시 걸어가면서 정동극장 예술단원들이 그들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무대에 서기 위해 불사른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는 반복하지만, 인간은 무릎 꿇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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