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돌 굴려 작업하는 최상철 작가 "그림은 만드는게 아니라 우연히 태어나는 것"

이한나 2021. 11. 8. 13: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7일까지 아트스페이스3 개인전
'게임 규칙'처럼 그림 풀어가
조약돌에 검은 잉크 묻히고
1천번 굴린 흔적으로 작업 완성
내년 아트 제네바·아트 브뤼셀 참여
최상철 작가가 2020년 대작 `무물 20-9`앞에선 모습 [사진 = 이한나 기자]
높이 455cm 가로 379cm 대작 '無物(무물) 20-9'앞에 선 작가 최상철(71)은 왜소했고, 쇳소리처럼 가는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전세계에 떠들썩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설계자로 판명된 1번 오일남이 퍼뜩 떠올랐다.

심지어 이 작가가 하는 작업도 규칙을 만들어 순서를 제대로 지켜가며 한단계씩 움직여 가는 것이 꼭 게임 하는 행위 같다. 다만 함께 겨루는 상대가 없을 뿐이다. 작가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다.

최상철 개인전이 열리는 아트스페이스3 갤러리 전경. [사진 제공 = 아트스페이스3]
오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 아트스페이스3에서 열리는 '최상철 개인전'은 지난 50여년간 독자적인 추상작업을 지켜온 그의 최근 3년을 펼쳐보인다. 언뜻 보면 윤형근의 추상 작품과 닮아보여 단색화 작가 같지만 작업 과정이 크게 차별화된다.

최 작가는 1999년경부터 그림이 경쟁의 도구가 되어가는 현실에 비판적 시각을 갖고, 욕망이나 의도를 배제해 '그리지 않고 완성'하는 그림을 추구해 왔다. 붓을 버린 대신 다양한 도구가 필요해졌다. 우선 검은색 잉크, 매끈한 조각돌 하나, 눈금이 표시된 동그란 고무 패킹, 하드 아이스크림 먹고 남은 나무스틱 등 주변에서 흔한 것들이지만 그림과 어찌 연결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최상철의 2021년작 `무물 21-9`(227.3x181.8cm). [사진 제공 = 아트스페이스3]
작가는 마치 딱지치기 게임에 임하듯 바닥에 고무패킹을 던지고, 눈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물감에 적신 조약돌을 4면을 틀로 막은 캔버스 위에 굴린다. 조약돌 움직임도, 던져서 나오는 고무패킹 방향이라는 '우연성'에 맡긴다. 그야말로 비틀스 노래 'Let it be'의 경지다.

평론가 정현(인하대)은 "최상철은 화단의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선택한 묵음의 세계에 몰두한다"며 "그의 작업 방식은 순수한 소비, 놀이로서의 예술을 실천하는 하나의 미학적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고 평했다.

최상철의 2021년작 `무물 21-7`(130.3x193.9cm). [사진 제공 = 아트스페이스3]
이번엔 양끝에 左(왼쪽), 右(오른쪽)라 쓴 작은 나무 스틱도 던져서 돌을 던질 방향을 결정한다. 매 순간을 '바를 정(正)'자로 기록해 꼭 1000번을 채워야 작업을 멈춘다. '무물 21-6'에서 '21-8'까지 작품이 이런 방식으로 태어났다. 우연의 결과물은 좌 508번, 우 492번 이런 식으로 기록된다.

최 작가는 "돌이 구르는 소리와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1000번 집중한 결과물이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한달 가량 소요된다"고 말했다.

'무명화가 최상철'이라 본인을 소개하는 작가는 마음에 드는 돌을 발견하면 '붓을 주웠다'고 표현한다. 작품도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났다'고 한다.

최상철 작가가 2020년 대작 `무물 20-9`앞에선 모습 [사진 = 이한나 기자]
최 작가는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았고 한국 현대미술 관련 단체전과 개인전에 참여해왔다. 실험미술과 추상미술을 했던 그룹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해 왔다. 추계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타진하고 나섰다. 지난해 스위스 AV모던&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의 호응에 힘입어 내년 스위스 아트 제네바와 벨기에 아트 브뤼셀에 참여할 예정이다.

박겸숙 평론가는 "최상철 작가는 어떠한 범주와 개념, 사조, 철학에 일체 기대지 않아 차별화된다"며 "회화란 무엇인지 그 본질적 의미를 되묻고 그 답을 찾아가는 어떤 진지한 태도가 작업 전반에 깔려 있다"고 밝혔다.

최 작가는 지난 2005년부터 무물 시리즈에 집중해 왔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없음(無)' 과 '존재(物)'하는 것이 합쳐진 단어다. 무제한적인 잠재성 속에 있던 무언가가 스스로 그려낸 궤적이 드러나는 순간을 함께하며 묵묵히 그와 조응하는 자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최상철의 2020년작 `무물 20-9` (455.0x379.0cm). [사진 제공 = 아트스페이스3]
[이한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