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운이 좋았다" 인천상륙·서울수복·장진호 참전한 100세 美해병대원 영면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2021. 11. 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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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한국전 기념비 건립 주도한 존 R. 스티븐스 중령,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
지난 4일(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주의 알링턴국립묘지에서 존 스티븐스 중령의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던 스티븐스 중령은 지난 5월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미경제연구소 제공

“나는 항상 운이 좋았어요.”

부산 교두보 전투, 인천 상륙 작전, 서울 수복, 원산 상륙 작전, 장진호 전투까지 6·25전쟁의 주요 전투에 다 참여한 존 R. 스티븐스(Stevens) 중령은 생전에 ‘한국전쟁 유산재단(Korean War Legacy Foundation)’과 가진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1950년 8월 경남 창녕 오봉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동성무공훈장을 받은 그는 23년 간 미 해병대원으로 복무하며 죽음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 그는 6·25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진주만 공격과 오키나와 전투를 경험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했다.

그런 스티븐스 중령이 지난 4일(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 알링턴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지난 5월 25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그가 국립묘지에 묻히는 순간을 기리기 위해 유가족 외에 한미경제연구소장인 캐슬린 스티븐스(Stephens) 전 주한미국대사 등이 현장을 지켰다. 스티븐스 전 대사는 안장식에서 “존 스티븐스 중령은 금문교가 내려다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공원에 한국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스티븐스 중령이 동료 참전용사들과 함께 여론을 조성하고 모금 활동을 일으켜 2016년 프레시디오 공원에 한국전 기념비를 완공한 것을 기리는 말이었다.

스티븐스 중령은 1921년 4월 22일 몬태나주 뷰트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만 18세의 나이에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가서 입영을 위한 신체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전날 밤새 포커를 친 탓에 시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후회하며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해병대 모병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약간의 돈을 주며 “호텔에 가서 푹 자고 내일 다시 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스티븐스 중령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나는 해병대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고향) 뷰트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1939년 그는 그렇게 해병대원이 됐다.

생전의 존 스티븐스 중령(오른쪽)과 부인 조앤 여사. /USS 샌프란시스코 기념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티븐스 중령은 진주만 공습과 오키나와 전투를 치러본 베테랑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헐리우드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가, 신문을 통해 6·25 발발 소식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전보를 받았죠. ‘즉시 복귀할 것. 한국 전쟁 발발'이라 써있더군요”라고 그는 회고했다. 가족들과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일주일 만에 전선으로 가야 했다. 그는 “해병대원은 싸우기 위해 훈련 받는다. 그것이 내 일이었다”고 말했다.

스티븐스 중령이 처음 투입된 것은 부산 교두보 전투였다. 생전의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나라였다”면서 “하지만 그때 나는 한국을 ‘내가 싸워야 할 곳'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스티븐스 중령은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도록 막아낸 1950년 8월의 ‘오봉리 전투'에서 싸웠다.

1950년 9월 15일, 스티븐스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은 다른 상륙작전과 달랐다”며 말했다. “우리는 칠흑 같은 밤에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어요. 뭍이 아니라 바닷물 위에 내렸습니다. 그 모든 게 통상의 상륙작전과 달랐어요.” 그는 이때 친구였던 발도메로 로페스 중위를 잃었다. 인천에 상륙하려는 미 해병대원을 향해 적의 총알이 빗발치자, 만 25세였던 로페스 중위는 용감하게 앞에 나서 적의 사격진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적의 기관단총이 수류탄을 든 그의 팔을 맞추면서 수류탄은 미군 쪽으로 떨어졌다. “로페스는 수류탄을 향해 몸을 날렸어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죠.” 로페스 중위는 훗날 스티븐스 중령을 비롯한 전우들의 증언과 추천으로 미군 최고의 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존 스티븐스 중령과 해병대 동료들이 1950년 9월 서울 외곽에서 한국인 통역의 도움을 받아 지도를 보고 있다. 가운데 지도를 가리키는 사람이 스티븐스 중령이다. /미 해병대 기록보관소

9·28 서울수복에 동참한 스티븐스 중령은 “서울로 가던 길이 기억난다. 가는 길에 우리는 북한군을 많이 생포했고, 그들의 무기를 파괴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동료가 북한군의 총을 파괴하려고 했는데 파편이 튀면서 누군가 죽기도 했습니다.” 스티븐스 중령은 10월 2일 원산상륙작전에 참여했고, 11월 말까지 장진호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는 장진호에 대해 “중공군이 사방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나 고요했다. 11월 말까지는 적막이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미국에 돌아온 스티븐스 중령은 1961년까지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전역 후 IBM에서 일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잊혀지지 않도록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스티븐스 중령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각각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 그는 생전의 ‘한국전쟁 유산재단'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해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서울은 개발됐지만 외곽으로 나가면 1950년대와 비슷했다. 1990년대에 다시 가보니 농촌 지역까지 번영하고 있었다”며 “2000년대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볼 수 있었는데, 그런 게 미국에도 있었으면 좋겠더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4월 만 100세 생일을 축하한 뒤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떴다.

지난 2019년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공원의 한국전 기념비 앞에서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오른쪽)가 기념비 건립의 주역인 존 R. 스티븐스 중령(가운데)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네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 조윤제 당시 주미한국대사가 보인다. 조 대사는 이날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미국대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한국전 기념비를 찾아 헌화했다. /한미경제연구소 제공

스티븐스 중령을 위해 4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안장식에는 그의 아내, 자녀, 손자녀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참석했다.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는 추도사에서 “세대가 바뀌면서 미국인들은 이미 한국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전역에는 한국전에서 복무한 이들의 묘비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이 한국의 특별한 부상에 기여했다는 얼마 간의 자긍심과 만족감으로 함께했던 희생이 기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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