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 가족사진을 꺼내보이면 반드시 죽는 이유 [왓칭]

윤수정 기자 2021. 11. 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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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익숙한 장면은 왜 꼭 반복될까? 넷플릭스 '할리우드 클리셰의 모든 것'

영화 속 한 인물이 전쟁 도중 동료에게 가족 사진을 꺼내 보인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터지는 긴박한 상황이지만 막간을 이용해 자신이 꿈꾸는 가족과의 미래를 줄줄이 읊는다. 특히 ‘이번 전투만’ 무사히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말이다. 과연 이 인물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할리우드 클리셰의 모든 것’은 이 인물이 ‘죽을 게 뻔한 사람(walking dead man)’을 그리는 ‘클리셰(판에 박힌 표현)’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그간 할리우드 상업영화들이 전쟁 도중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꺼내 보이거나 위험한 업무를 딱 한 번만 끝내면 은퇴하는 인물은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연출해 왔다는 것이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면 엔딩크레딧이 나올 때까지 생존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욱 더 높아진다.

‘할리우드 클리셰의 모든 것’은 이처럼 그간 영화에서 즐겨 쓰여왔던 각종 ‘클리셰’의 예시를 하나씩 분석하고, 꼬집는 예능이다. 진행을 맡은 배우 ‘롭 로’를 비롯해 실제 할리우드 클리셰를 직접 연기한 배우들, 이를 연출한 감독, 미국 영화 비평가들이 직접 출연해 생생한 증언과 분석을 더한다. 그만큼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할리우드 상업 영화 속 클리셰들을 새삼 들춰내 보는 재미를 준다.

◇모든 ‘클리셰’에는 이유가 있다

할리우드 클리셰의 모든 것 진행자인 미국 배우 롭 로가 영화 속 주인공의 일상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이는 장바구니를 들어보이고 있다. /넷플릭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특히 자주 쓰이는 클리셰 장면일수록 이걸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때때로 클리셰는 자칫 잘못 쓰면 ‘뻔한 연출’이라는 비평을 불러오는 연출 요소지만, 적재적소에 쓰면 극적인 연출이나 관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낼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이 화가 난 걸 표현할 때 책상 위 물건을 쓸어버리거나 때려 부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코미디 장면에서 배우들이 당황한 모습을 연출할 때 꼭 마시던 액체를 뿜어내게 하는 장면도 전형적인 클리셰다. 사실 현실에서 화가 난다고 책상을 때려 부수거나, 당황할 때마다 액체를 뿜어내는 사람을 쉽게 찾아보긴 어렵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런 특성들이 배우의 감정 연기에 관객들이 감정 몰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때로는 이런 클리셰들이 특정 장르에 더해지는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로맨틱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들은 꼭 삼각, 사각관계에 휘말리게 하고,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비행기 출발 시간을 앞두거나 비가 내리는 악천후를 뚫고 만나 키스를 나누는 것으로 연출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한 할리우드 여배우는 촬영장에서 감독이 “내가 보고 자라온 로맨틱 영화의 정석”이라며 이런 장면을 대놓고 연기해줄 것을 요구 받았을 정도라고 고백한다.

장면이 아닌 소품 자체가 클리셰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줄 때는 반드시 바게트 빵 하나가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들게 하고, 파리에 도착했음을 암시할 때는 ‘에펠탑’을 반드시 등장시키는 식이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덕분에 에펠탑이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영화에서 ‘1순위로 파괴해야 하는 상징물’처럼 쓰이고 있다고 꼬집는다.

이밖에도 액션 영화는 좁은 골목길에서 각종 시장 가판을 때려 부수며 달리는 자동차 액션이, 공포 영화에서는 사람을 놀래키는 고양이가, 재난 영화에서는 불안하게 날아다니는 새 떼, 낑낑거리는 강아지 등 꼭 동물들이 닥쳐올 재난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 전형적인 클리셰로 지목된다.

◇시대 변화상을 담은 클리셰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며 성적인 관계를 맺는 장면을 암시적으로 묘사한 영화 타이타닉 속 한 장면. /넷플릭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대부분 클리셰에 영화가 촬영되던 당시의 시대 변화상이 담겨져 왔다고 말한다. 모두가 예측 가능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선 그 시대에 통용되는 공통 정서와 문화적 코드를 함께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촬영 현장이 꾸려지는 현실 속 제재에 따라 영화 속 클리셰도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초부터 모든 영화들이 성 관계 장면을 간접적인 묘사로만 처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그 전까지는 나이에 따라 영상물 보는 걸 제한하는 등급 제도가 없어 여성의 나체를 그대로 노출 시키는 장면이 많았다고 말한다. 특히 여성 등장 인물들을 직장 내 모든 남성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며 승진하거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문란한 것처럼 그려 언론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결국 1930년 공화당 의원이었던 윌 헤이스가 영화 속 퇴폐 장면을 정화하겠다며 촬영 규칙 ‘헤이스코드’를 법제화한다. 성적인 장면을 찍을 때 남녀 배우 중 한 사람의 다리 한쪽은 꼭 땅에 닿아 있어야 하고, 속옷은 노출해도 되지만 가슴은 노출하면 안 된다는 등 상당히 엄격한 규칙이었다.

덕분에 할리우드 업계는 한동안 성적 장면을 암시에 가까운 클리셰 장면들로 대체해야만 했다. 열차 안 남녀 주인공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키스를 하기 시작하는 순간 갑작스레 터널 안으로 진입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거나, 뜨겁게 사랑하는 장면을 불을 뿜는 화로 등 다른 장면으로 전환해 암시하는 식이었다. 우리나라 영화로 치면 한복을 입은 여성의 옷고름을 풀거나 두 남녀의 몸이 포개지는 순간 물레방앗간을 비추는 장면들처럼 말이다.

이후 1960년대 가슴 노출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유럽 영화들이 대거 수입되면서 지금의 영상물 등급제가 할리우드에 도입됐고, 성적 장면에 대한 촬영 자유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여전히 간접적인 성관계를 암시하는 클리셰 장면들이 등급제를 우회하기 위한 꼼수처럼 쓰인다고 지적한다. 속옷을 입은 채 성관계를 맺거나, 등장인물들의 신음소리와 함께 침대 시트를 움켜쥐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PC)’ 비판대에 선 클리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그린북’의 한 장면. 흑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기는 했지만, 여전히 백인을 '구원자'로 그리는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넷플릭스

잘 만들어진 클리셰 장면은 창의적인 결과물을 낳기 위한 디딤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클리셰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클리셰도 결국 ‘하나의 편견’이므로 무비판적으로 쓰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인종차별, 남녀평등 등을 다루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논쟁이 관련 클리셰 장면들로도 번지고 있다고도 말한다. 클리셰 장면들 대부분이 ‘남성’과 ‘백인’에게 우호적인 장면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다.

흑인 할리우드 업계 관계자들은 특히 영화 속 백인은 항상 흑인에게 도움을 주는 ‘구원자’이자 주인공으로, 흑인은 주인공인 백인이 갈 길을 알려주는 마법사이자 조연으로 그려진다고 비판한다. 항상 인생의 행복을 설파하거나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백인을 용서하는 ‘행복한 검둥이’도 위험한 설정이라고 지적한다. 자칫 백인들이 무슨 짓을 해도 흑인이 용서해 주니 인종차별 또한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캣우먼'처럼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선 여주인공이 전투에 나가기 전 몸을 옥죄거나 노출이 심한 가죽 옷을 입고, 높은 하이힐 부츠나 구두를 신은 모습을 클리셰 장면으로 써왔다. /넷플릭스

다수의 남성 주인공에게 둘러 쌓인 ‘단 한 명의 여성 주인공’이란 설정도 ‘제작사 구색 맞추기용’ 클리셰의 전형이란 비판이 나온다. 그간 여성을 ‘남성 주인공의 들러리용 조연’으로 써왔다는 비판을 모면하려고 단순히 주연 중 하나로 추가만 해뒀을 뿐, 정작 그 역할은 여전히 남성 주인공을 보조하는 걸로만 한정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 주인공이 위기 상황에서도 하이힐을 신고 뛰거나, 몸을 옥죄는 가죽 옷을 입고 싸우는 장면들도 비현실적이란 비판이 나온다. 한 할리우드 관계자는 “할리우드가 여성을 지나치게 예쁘게만 그리려다가 완전히 비실용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한다.

◇ 클리셰, 창작의 디딤돌이 되는 지루함

사실 ‘뻔한 장면’으로 불리는 클리셰가 창의성을 중시하는 영화계에서 좋은 평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보다는 신선하고 파격적인 연출이 시상대에 오르기 유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클리셰가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뻔한 장면의 클리셰가 있기 때문에 이를 비틀고, 깨부수는 장면들이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그저 모르고 지나쳤던 클리셰들을 한 번쯤 어떤 의도로 넣은 장면들인지 고민해보면서 본다면 색다른 영화 감상 경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 속 예시들이 전부 할리우드 영화에만 국한돼 있고, 한국 영화는 ‘올드보이’ 한 편밖에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았지만 그밖의 국내 작품 속 클리셰들과도 공통분모가 있는지 비교해보며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요 l 미국 l TV예능, 코미디 l 58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특징 보고 나면 한동안 할리우드 영화를 분석하며 보게 됨.

평점 IMDb⭐6.1/10 로튼토마토🍅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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