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생각도 분리수거

임규연 2021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2021. 11. 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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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회사에 취직하고 독립을 했다. 독립하면서 맹세했다. 쓰레기와 청소를 귀찮아하지 않기로. 퇴근하고 집에 오면 어디든 누워서 뒹굴 수 있게 이틀에 한 번은 먼지를 없앴다. 뿌리는 락스를 사서 전(前) 세입자가 피운 담배의 흔적을 깡그리 없앴다. 집이 깨끗하니 나도 즐거웠다.

[일사일언] 생각도 분리수거

문제는 분리수거였다. 내가 사는 곳은 지하 1층에 내려가 분리수거를 하고, 1층 밖으로 나가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분류해 버려야 했다. 왔다 갔다 하기도 귀찮고 작은 거 하나 골라내야 하는 게 너무 신경 쓰였다. 페트병 하나를 버려도 비닐을 떼야 하고,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으면 통에 묻은 양념을 싹싹 닦아야 하고 단무지는 국물을 쭉 짜서 버려야 한다는 게 귀찮았다.

분리수거되는 쓰레기들은 원래 하나지만 플라스틱, 페트병, 비닐, 종이로 나뉘는 것 아닌가. 사람도 미래를 모르는데, 저들엔 앞날이 정해져 있었다. 쓰레기들은 곧 다른 것들로 재탄생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너무 오래되거나 더러운 것은 누군가 알아서 버려준다.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쓸데없는 망상을 진지하게 했다. 이렇게 살다가 갑자기 대통령이 된다면?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면?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다면?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 밖에 잘 못 나가니까 먹을 거랑 마실 게 중요하겠지. 그러면 둘 다 있는 목욕탕으로 피하자 같은 망상인데, 그럴 때면 꿈에서도 같은 내용이 펼쳐졌다. 얼마 전에는 좀비 세계관에 뚝 떨어져 나 홀로 살아남기를 도전했으나 죽기 직전에 깨어났다.

어쩌면 쓰레기 같은 생각일 텐데, 쓰레기처럼 생각을 분리수거하는 건 어렵다. ‘언젠가는 글 쓸 때 도움 되지는 않을까?’라는 기대로 상념을 잊지 않으려 메모도 한다. 그렇게 쌓인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버릴 때가 됐는데, 망설여진다. 지금까지 쓰지 않았다면 안 쓴 이유가 있을 것일진대, 여전히 ‘혹시나 싶어’ 남겨둔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강박을 지닌 사람을 호더(hoarder)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생각 호더인가?

일사일언/임규연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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