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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1. 11. 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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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서한나ㅣ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책 읽다 창밖을 보았는데 바깥이 무너져내렸다. 어떤 책이 내 안에 틈을 낸다. 틈이 점점 커진다. 나를 달라지게 한다. 책이든 노래든 인간이든 묘한 구석이 있으면 좋다. 뭐지? 싶은 책이 있다면 그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길들지 않은 것이거나 공들여 길들인 것이거나.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나는 익산에 있었다. 시원한 공기에서 나무 냄새가 났다. 거리에 사람이 적고 자동차 소리가 컸다. 잡곡과 부식을 파는 오래된 가게들을 지나니 남부시장이 있었고, 책방은 시장 안에 있었다. 주황색 불빛이 새어 나오는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내 책을 읽고 북토크를 들으러 온 이들이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틈틈이 읽었다는 분, 책방 손님들이 동시에 이 책을 보길래 궁금했는데 어느 날 책방 사장님이 읽고 있어 그 책 달라고 했다는 분, 유튜버가 추천해서 봤다는 분, 서울에서 기차 타고 오신 분, 기타 들고 기차 타고 오신 분, 다 달랐다.

사람들과 책방은 서로 어울렸다. 여기 자주 오세요? 익산에 사는 분이 답했다. 저는 여기서 책 읽고 주시는 차도 마시고 하면서 구원받았어요. 나는 온 지 한시간밖에 안 됐으면서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체험하게 하고 나를 기다리는 공간은 나를 지켜주기도 한다. 책방 운영자인 두 분을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북토크가 끝나고는 책만 사고 나왔다.

어떤 공간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해도 몸이 바뀌는 기분이 든다.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지역의 공간들이 사라지는 것을 자주 보아왔고, 그래서 조급했다. 모든 이들이 돌아간 뒤, 사장님 두 분은 무언가 잔뜩 든 종이가방 두개를 가리키시더니 손이 없으니 차에 실어주시겠다고 했다. 책은 취향을 타니 그림책을 넣으셨다고.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집에 도착해 신발장에 그대로 앉아 종이가방을 풀었다. 밤 조림, 수제 맥주 캔, 수세미, 비누, 얼려 먹는 요구르트, 그림책이 있었다. 좋을 것 같았고, 역시 좋았다. 주인공은 책을 좋아해 걸으면서도 책을 읽다 문설주에서 부딪히곤 한다. 책을 읽고 또 읽던 어느 날 집 안 천장까지 책이 쌓이게 되고, 더 이상 책을 한권도 사들이지 못하게 되자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부하기로 한다. 책의 제목은 <도서관>이다. 이 책방의 이름은 ‘두번째 집’이다.

종이가방 안에 든 것을 거의 다 구경했을 때쯤, 사진 한 장과 메시지가 왔다. 작가님 없이 뒤풀이했어요. 아쉽고 웃기고 좋았다. 독자들이 해준 이야기, 책방에서 받은 느낌은 대전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한번, 종이가방을 풀어보며 한번, 그림책을 보며 한번, 어쩌면 그날의 북토크와도 책방과도 관련없을 여러 순간들을 거치며 내 안에서 커졌다. 이 책방에 오면 속에서 많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들어오기 전까지 했던 생각이 무엇이든, 무너지고 다시 지어질 것 같았다.

한 독자는 책 읽고 어떠셨냐는 내 말에 책 읽던 날의 혼잣말을 재연해주었다. 아니, 이렇게 쓴다고? 진짜? 밤에? 난 어떡하라고? 혼자서 따져 묻는 듯한 연기에 나는 웃게 되었다. 그날 밤, 나도 혼자 따져 물었다. 아니, 갖다 놓은 책이 저렇다고? 근데 조명이 그렇다고? 수세미에 비누까지 챙겨주고 아무 말씀도 안 한다고? 너무 좋은 그림책 주시곤 뒤풀이에 안 부른다고? 그러나 의문과 혼란 속에서도 좋은 느낌은 정통으로 온다.

익산에서 대전으로 넘어오는 밤의 고속도로에서 노래를 크게 들었다. 블루스도 듣고 힙합도 들었다. 노래가 잘 받았다. 사장님과 작별인사 하면서 근처 올 일이 있으면 들르겠다고 했지만, 그건 철없는 말이었다. 그 책방에 가고 싶다. 가면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웃긴 말을 듣든, 맘이 달라지든, 책에 빠지든, 어떻게 될 것 같다.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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