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원폭 최대 1만명 희생..76년 만에 한국인 위령비

김소연 2021. 11. 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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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
양심적 일본인들 1979년 조선인 추모비 세웠지만
총련 추모행사 참여로 민단 쪽은 거리감, 남북 분단 비극
지난 6일 오전 10시40분 일본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오른쪽이 위령비 모습. 나가사키/김소연 특파원

“이 비는 원폭으로 인한 수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당한 동포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치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증표입니다.”

지난 6일 오전 10시40분 일본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 히라노 노부토 평화활동지원센터 소장 등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도쿄 등에서 내려온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 정부와 민단이 위령비 건립을 추진한 지 27년 만에 이뤄낸 성과라 다들 감격스러운 모습이다. 히로시마엔 1970년 한국인 위령비가 세워졌지만, 나가사키에는 없었다.

위령비 건립위원장인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현 단장은 “한국인 동포의 손으로 염원하던 위령비를 건립할 수 있게 됐다”며 “피폭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에 있었던 권순금(95) 할머니도 지난 5일 한국 특파원들을 만나 “기쁘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권 할머니는 한국인 위령비가 없어 1960년대부터 나가사키시가 주최하는 원폭 희생자 위령제에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비석을 세우기까지 과정도 험난했다. 나가사키시와 비석 크기나 문구 하나를 갖고 수년 동안 갈등을 벌였다. 결국 강제동원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설명하면서 ‘강제’라는 표현 대신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라는 문구를 넣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불법적인 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건립위원장인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 단장이 6일 오전 위령제에서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소연 특파원

이번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비는 비극적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9일 오전 11시2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이곳에 살고 있던 24만여명 중 7만4천여명이 숨졌다. 일본인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것은 조선인이었다. 위령비 안내문에는 “나가사키시와 주변 지역에 (조선인) 약 3만5천명이 거주했고, 수천 명에서 1만명으로 추정되는 우리 동포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적혀있다.

일제 식민지 당시 조선 사람들은 나가사키에 몰려있는 군수공장과 탄광 등에 대거 동원됐다. 지난 2001년 고인이 된 서정우씨도 대표적 인물이다. 1928년생인 서씨는 15살 때 ‘군함도’로 불렸던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섬 하시마 탄광에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섬 밖으로 나오게 됐고, 미쓰비시조선소에서 일하다가 피폭을 당했다. 강제동원에 피폭, 조선인 차별까지 ‘3중고’에 시달렸던 서씨는 자신이 군함도에서 겪었던 일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사실 나가사키에는 한국과 관련한 또 하나의 원폭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사망자가 1만명이라는 것을 1981년부터 자료와 현장 조사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낸 고 오카 마사하루 목사와 일본 시민들이 지난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세웠다. 이들은 매년 8월9일 오전 7시30분에 추모행사를 한다. 벌써 42년째다. 이번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비와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다. 추모비에는 ‘강제연행 및 징용으로 중노동을 하던 중 피폭으로 사망한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해서’라는 글이 적혀있다. 신카이 도모히로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부이사장은 지난 5일 <한겨레>와 만나 “오카 목사를 중심으로 양심적 일본인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모금 운동을 통해 추모비를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사망자가 1만명이라는 것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고 오카 마사하루 목사와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지난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세웠다. 이번 한국인 위령비와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다. 나가사키/김소연 특파원

하지만 추모비에 ‘조선인’이라고 적혀있고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소속 사람들이 추모행사에 참여하면서 민단 중심의 한국인들은 이 추모비와 거리를 뒀다. 남북 분단의 갈등은 ‘원폭 희생’이라는 공통의 아픔마저 함께 나눌 수 없게 만들었다. 강성춘 단장은 “전후 이미 두 개(남북한)의 나라가 됐는데, 한국인이라는 표현이 없는 등 추모행사에 동포들이 참여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에 신카이 부이사장은 “추모비에 적힌 조선인은 (일제강점기) 당시 표현을 쓴 것이지 북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식민지도, 분단도 모든 원인은 일본에 있다. 우리와 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내년부터 민단의 추모 행사에도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사키/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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