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이제야 한국인 원폭위령비 세워진 이유 생각해 봐라" [특파원+]

김청중 2021. 11. 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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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 76년 만에 한국인희생자 위령비 건립
가을비 속 제막식..강창일 대사 "하늘에서 영령 눈물"
당시 강제연행자 등 한인 7만명..최대 2만 희생 추정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 강성춘 재일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 무카이야마 무네코 나가사키 시의회 공명당 대표 등이 6일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를 제막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가 6일 제2차 세계대전 원폭 투하 76년 만에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한국인 위령비가 세워진 것에 대해 “일본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전 일본 나가사키현(縣) 나가사키시 평화공원 인근 원폭자료관 앞에서는 늦은 가을비가 축축이 내리는 가운데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식이 엄수됐다.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76년,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건립추진 27년 만의 일이다.

강 대사는 제막식 후 원폭자료관에서 열린 위령제 추도사를 통해 “오늘 비가 오는 것은 하늘의 영령(한국인 희생자)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어 “혹자는 한국인을 위한 위령비가 자칫 한·일간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며 “그런데 나가사키  공원에는 일본 현마다 위령탑이 세워져 있고 중국(의 비)도 이미 세워져 있다. 가장 가까운, 그리고 같은 가치와 이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위령비가 이제까지 없었던 것에 대해 일본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앞에 건립된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일본 고교생들 평화의 종이학 접어 바쳐

제막식에는 강 대사를 비롯해 건립추진위원장 강성춘 재일대한민국민단(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 무카이야마 무네코(向山宗子) 나가사키 시의회 공명당 대표 등 한·일 관계자 약 200명이 참석했다. 참석자 중 약 20%는 일본인이었다.  

위령비를 감싸고 있던 흰색 천이 제거된 뒤 국기에 대한 명세와 애국가 제창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위령비에 헌화하면서 원폭이 투하됐던 시간인 오전 11시2분에 맞춰 1분간 묵도를 하기도 했다. 
강창일 주일 대사가 6일 나가사키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나가사키현 내 일본인 고등학생 7명(남1·여6)으로 이뤄진 평화사절단이 손수 접은 평화의 상징인 종이학 1000마리를 위령비에 바쳤다.

강 대사는 추도사에서 학생들을 가리켜 “여러분이야말로 일본의 희망이고, 아시아의 희망이자, 세계의 희망”이라며 “앞으로도 청소년 여러분이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말했다.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 단장은 인사말을 통해 1994년부터 시작된 위령비 건립 경위를 설명한 뒤 “우리 한국인 동포의 손으로 염원하던 위령비를 건립할 수 있게 됐다”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코로나 사태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들을 초대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무카이야마 무네코 의원은 위령제 인사말에서 “원폭으로 돌아가신 한국인 희생자, 조국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걱정하며 돌아가신 영혼에 삼가 추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식 참가들이 6일 오전 11시2분 1945년 8월9일 당시 원폭이 투하됐던 시간에 맞춰 1분간 묵도를 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한인 희생자 지원 활동가  “미래 위해 과거 회고하는 귀중한 하루”

1945년 8월6일 원폭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시에는 1970년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가 현지 평화기념공원에 건립됐다. 매년 히로시마 원폭투하 전날인 8월5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나가사키는 원폭투하로 7만3884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된다.(1950년 나가사키시원폭자료보존위원회 조사) 이 중 한반도 출신은 최대 2만2198명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1991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인권을지키는회 ‘원폭과 조선인’)

한국인 원폭희생자의 역사는 일제 강점과 강제동원이라는 우리 고난의 민족사와 궤를 같이한다.
히라노 노부토 일본 평화활동지원센터장이 6일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식 행사에 평화대사로 참석한 일본 고교생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원폭자료관은 전시물에서 “나가사키에서 많은 외국인이 피폭됐다. 피폭자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조선인이었다. 조선반도에서 강제연행돼 군수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동원된 사람이 많았다”고 적시하고 있다.

한국을 500차례 방문하며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도와온 히라노 노부토(平野伸人) 평화활동지원센터 소장은 “오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회고하는 귀중한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며 자동차의 백미러(리어뷰미러) 이야기를 했다. 그는 “백미러는 뒤를 보는 것이지만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나는 앞으로도 백미러의 역할을 수행해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강성춘 단장 “한국인 동포 염원 드디어 성취”

강성춘 단장은 제막식에 앞서 지난 5일 민단 나가사키현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재일 한국인 동포의 손으로 염원이던 나가사키 원폭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드디어 건립했다”고 소감을 말했다.
강성춘 재일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이 5일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건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위령비는 3m 높이다.  건립위는 당초 높이 3.5m로 만들려고 했지만, 나가사키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0.5m 낮췄다.

위령비 전면에는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비’라고 적혀 있고 그 앞에는 한글, 영어, 일본어로 돌로 된 안내문이 있다. 한글 안내문에는 ‘우리 조국은 1945년 8월15일까지 35년간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본인의 의사에 반(反)하여 노동자, 군인 및 군무원으로 징용, 동원되는 사례가 증가하였고, 이미 이주했던 사람을 포함해 당시 나가사키시현 내 우리 동포는 약 7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자폭탄은 약 7만4000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수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정되는 우리 동포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적고 있다. 

비문 내용과 관련해선 시 당국이 반대한 강제동원이라는 표현 대신 ‘본인의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을 넣는 것으로 절충했다. 이날 행사장을 취재한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 기자는 강창일 대사에게  ‘본인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의 의미를 물었다. 강창일 대사는 “본인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에 강제연행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자료관 앞에서 6일 열린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식에 비가 오는 와중에도 약 200명이 참가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나가사키시 평화공원 한쪽 구석에는 1979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일본 시민단체 주도로 건립된 작은 크기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도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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