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있는 연구와 혁신 기술과 가치를 잇다

송민령 2021. 11. 6.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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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씁니다] 기술과 가치가 긴밀하게 얽혀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술과 가치를 연동하려는 시도는 드물었다. EU가 이 부분에서 특히 적극적이다.
시민들과 잘 소통하지 않으면 기껏 개발한 기술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백신접종 의무화 반대 시위(위) 등의 영향으로 미국은 코로나19 백신을 다량 보유하고도 접종률이 낮다.ⓒAFP PHOTO

아이오와 도박 게임이라는 실험이 있다. 이 실험의 참가자에게는 카드 묶음 4개가 주어지고, 참가자는 매회 카드 묶음 하나를 골라 카드를 뒤집는다. 카드에는 ‘만원 잃었습니다’ ‘2만원 얻었습니다’ 등이 적혀 있고, 참가자는 이 결과에 따라 돈을 얻거나 잃는다. 4개 중 2개 묶음은 뒤집다 보면 돈을 얻고, 나머지 두 묶음은 돈을 잃게 되어 있다. 참가자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시작하지만 신기하게도 열 번쯤 뒤집고 나면 나쁜 카드 묶음을 고를 때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50번쯤 뒤집으면 ‘어째선지 이 카드 묶음은 싫고, 저 묶음은 좋다’는 식으로 감을 잡기 시작하고, 90번 넘게 뒤집고 나면 의식적으로도 어느 카드 묶음이 좋은지 알게 된다. 이렇게 알아가는 동안 참가자는 좋은 카드 묶음을 점점 더 자주 고른다.

그런데 배측 중앙 전전두엽이라는, 눈 뒤쪽의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는 다르다. 이들은 나쁜 카드 묶음을 고를 때 손에서 땀 분비가 늘어나지 않으며, 어느 카드 묶음이 좋고 나쁜지 감을 잡지도 못한다. 이들도 90번쯤 뒤집고 나면 어느 카드 묶음을 골라야 돈을 얻는지 깨닫기는 한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도 나쁜 카드 묶음 대신 좋은 카드 묶음을 더 자주 고르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배측 중앙 전전두엽은 사실 정보를 좋고 싫다는 감정과 통합해서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 따라서 이 부위가 손상된 환자들은 사실을 알아도 그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지 못한다.

이 결과는 현명하게 선택하려면 사실 파악만큼이나 좋거나 싫다는 ‘가치’가 핵심적임을 보여준다. 가치는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어디에 자원을 할당할지, 어떤 사실을 더 알아보려고 노력할지,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도록 이끈다. 반대로 사실을 알고 나면 가치관이 바뀌기도 한다.

저번 글에서는 과학이 관측된 사실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학문이며 그러기 위해서 사실을 엄정하게 다룬다는 점을 소개했다(〈시사IN〉 제730호 ‘과학에 모든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 참조).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배측 중앙 전전두엽처럼 사실과 가치를 잘 연계할 수 있을지 살펴보자.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인구이동, 기후위기 등 각종 난제를 겪고 있고, 기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다. 하지만 기술이 반드시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개발되지는 않는다. 대체에너지 개발, 자원순환, 백신, 미세먼지 감소처럼 당장의 이익은 불확실하지만 중요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에는 투자가 부족해지기 쉽다.

시민들과 잘 소통하지 않으면 기껏 개발한 기술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백신을 다량 보유하고도 만연한 백신 거부 때문에 접종률이 낮은 미국이 그 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채팅봇 ‘이루다’ 논쟁

가치와 제도는 정해져 있고, 기술은 그 틀 안에서 작동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혁신적인 기술은 이전에 없던 상황을 초래해 가치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채팅봇 ‘이루다’를 둘러싼 혼란과 논쟁이 그랬다. 이런 경우 차별과 편견을 확대 양산하지 않는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는 없는지, 인공지능을 대하는 태도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로 확산될 여지는 없는지 등 새로운 상황에 대한 사실 연구가 필요하다. 아울러 개발자가 인공지능의 성별을 정한 배경, 사용자들의 태도 등 이면의 가치도 살펴보아야 한다.

기술이 기존 가치와 충돌하기도 한다. 가상화폐가 탈세와 자금세탁에 사용되는 것이 그 예다. 기술로 인한 혜택과 불이익이 고르게 나눠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우버와 배달앱 등 플랫폼에서 생계를 잇는 사람이 늘자, 세계 각국에서 이들의 안전과 권익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우버 기사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권익을 보호하도록 판결했고, 스페인에서는 배달 플랫폼 기사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미국에서도 플랫폼 기사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판결이 나왔다. 신기술로 창업한 기업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호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맞춰가야 하는 것이다.

기술은 기존 가치와 충돌하기도 한다. 비트코인(아래) 같은 가상화폐가 탈세에 이용되는 게 그 예다.ⓒJENS KALAENE

이처럼 기술과 가치가 긴밀하게 얽혀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기술과 가치를 명시적으로 연동하는 방법이 추진된 경우는 드물다. 막연히 기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거니 짐작하거나, 기술 발전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에서 ‘책임 있는 연구와 혁신(Responsible Research & Innovation·RRI)’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부터 이런 일을 시도하고 있다. (1)시민사회의 가치와 필요를 반영하는 연구가 진행되도록 하고(예:유럽연합의 대규모 뇌연구 프로젝트는 초기부터 RRI 부서를 포함), (2)시민들에게 과학기술을 잘 소개한다(예:유럽연합의 세금 지원을 받은 연구는 출간 즉시 무료 공개하도록 추진 중). (3)기술의 잠재적인 위험과 기회를 알리고 대비하는 한편(예:뇌 연구 빅데이터를 공유하면서도 개인정보를 보호하도록 대비) (4)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논의(예:자율주행차 운영에 대해 시민들과 다양한 형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유럽의 RRI를 보면서, 과학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축한 유럽의 내공은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지금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싹트던 수백 년 전과 다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세계관)도, 우리를 둘러싼 지구환경(당면한 현실)도, 우리가 가진 기술(수단)도 모두 다르다. 예컨대 그때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만연했지만, 코로나19를 극복하려면 가난한 나라에도 백신을 공급해야 한다. 기본소득처럼 새로운 제도도 논의되고 있다. 수백 년 전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가치와 과학기술을 연계하는 유럽의 RRI와 같은 활동을 통해서 이번에는 한국도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송민령 (뇌과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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