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 미국 간첩 사건, 냉전 초기 양국 대화 촉진시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1〉
냉전 초기, 엉뚱한 사건이 미국과 중국의 대화를 촉진시켰다. 1954년 11월 중국 인민최고법원이 미국 간첩 사건을 판결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주재 영국대사를 통해 중국 측에 사건 조회를 의뢰했다. 국무부는 부본(副本)을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에게 보냈다. 회원국에 배포를 요구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가만있지 않았다. 검찰이 작성한 기소이유서와 판결문 외에 항의 서신까지 유엔총회 의장에게 발송했다. “미국 간첩 사건은 중국의 내정문제다. 우리의 법률은 존엄하다. 유엔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적들이 매도해도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다.”
유엔 사무총장, 베이징 방문
1955년 새해 벽두, 함마슐드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저우언라이와 네 차례 회담을 가졌다. 저우는 완강했다. “중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다. 미국 간첩 처리에 관한 유엔 결의안을 수용할 수 없다.” 함마슐드는 유엔헌장까지 거론하며 미국을 변호해도 저우는 담벼락이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 같은 공동성명을 냈다. “우리의 회담은 유익했다. 긴장 완화를 위해 계속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함마슐드가 베이징을 떠나기 전, 중국 측이 미국 간첩들의 생활을 찍은 사진을 건넸다. “미국의 가족들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미국 정부는 저우에게 감사편지 보내라고 가족들을 독려했다. 중국은 중국적십자회 명의로 답신을 보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올 수 있다면, 중국적십자회는 귀하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유엔을 동원해 중국을 압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불발됐다. 직접 접촉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미국의 반응도 적극적이었다. 반둥회의 종결 3일 후, 국무장관 덜레스가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중국과의 담판을 배척할 이유가 없다”며 단서를 달았다. “대만도 참가해야 한다. 담판이 신중국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한 발 더 나갔다. “담판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가 강화되기를 바란다.” 국무부가 여론을 분석했다. “저우언라이의 제의와 미국의 적극적인 반응으로 평화에 대한 희망이 다시 일어나기를 다들 고대한다.” 영국과 인도가 미·중 양국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나섰다.
영국·인도, 미·중 만남 주선
영국은 중국의 태도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 정부도 영국을 통해 중국에 제의했다. “중·미 쌍방의 대사급 대표가 제네바에서 회담을 거행하자.” 미국의 목적은 억류자를 포함한 교민의 안전한 귀국이었다. 중국이 동의하자 성명을 발표했다. 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국 승인은 반대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마오쩌둥이 회담 대표로 폴란드 대사 왕빙난(王炳南·왕병남)을 낙점했다.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요한슨을 내세웠다.
회담에 임하는 미국 정부의 속내는 복잡했다. 어쩔 수 없이 응한 회담이었다.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도 우려했다. 회담대표 요한슨이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기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물었다. 덜레스는 “길어야 3개월”이라며 낯을 찡그렸다. 15년을 끌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곡절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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