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위기의 꿀잠

조찬제 논설위원 2021. 11. 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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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꿀잠을 지키는 사람들이 4일 서울 영등포구청 앞에서 신길2구역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꿀잠 쉼터 존치를 위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꿀잠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사회 공동체 공간이다. 한수빈 기자

“전남 여천군 소라면 쌍봉리 끝자락에 있는/ 남해화학 보수공장 현장에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밑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들 있으리….” 송경동 시인의 시 ‘꿀잠’ 첫 부분이다. 시인이 젊은 시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고단한 현실을 담은 것이다. 잔업과 철야로 부족한 잠을 메우기 위해 점심시간에 선잠을 잘 수밖에 없지만 그들에겐 그야말로 꿀잠이었을 터이다. 노동자에게 꿀잠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해고노동자들에게 꿀잠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들이 있을 곳은 길바닥이나 천막, 아니면 저 높은 굴뚝이나 철탑, 크레인, 전광판 등이다. 한여름 땡볕에도, 한겨울의 살을 에는 추위에도 한뎃잠을 잘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랜 투쟁과 해고로 지친 몸을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바람으로 탄생한 것이 비정규 노동자 쉼터 꿀잠이다. 고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를 비롯해 시민 2000여명의 도움으로 2017년 8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문을 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에 시민사회가 연대한 결실이었다. 이 꿀잠은 비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해고노동자, 희생자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연대의 공간이었다.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씨도, 고 문중원 기수의 부인 오은주씨도 사랑하는 이를 보낸 뒤 상경투쟁을 할 때 이곳에 머물며 힘겨운 투쟁을 이어갈 힘을 얻었다. 설립 후 매년 4000명이 이용한다고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신적 보루라고 부를 만하다.

이런 꿀잠이 재개발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꿀잠이 터잡은 지역에 지난해 3월 재개발조합 설립 인가가 떨어지면서다.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대책위원회가 영등포구청과 재개발조합을 상대로 존치 운동을 벌였지만 무위에 그치고 있다. 꿀잠의 공공적 기능을 인정하고 공간 존치를 계획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한 구청과 조합이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꿀잠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한 공간이 없어지는 차원을 넘는다.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역사와 그 현장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일이다. 꿀잠이 “투기와 욕망의 폭주기관차”가 돼버린 부동산 재개발에 희생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조찬제 논설위원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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