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우월주의, 반페미니스트의 소굴 잠입해 극단주의 파헤친 '한낮의 어둠'

김종목 기자 2021. 11. 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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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낮의 어둠

율리아 에브너 지음·김하현 옮김|한겨레 출판|384쪽|1만7000원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주인공인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빨간 약을 먹으면 괴로운 진실을 목도하게 되고, 파란 약을 먹으면 행복한 거짓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한낮의 어둠>의 저자는 “극우는 이 영화 속의 비유를 사용해 지금 당신은 ‘국제적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말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그 유명한 장면은 네오나치 같은 전 세계 극우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너는 네 침대에서 깨어나고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되지. 빨간 약을 먹으면 너는 이상한 나라에 남게 돼. 내가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줄 거야.” 빨간 약을 선택한 네오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노예로 삼고, 인간 몸에서서 에너지를 얻으려 만든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살았다는 걸 깨닫는다. 저자는 “극우는 이 영화 속의 비유를 사용해 지금 당신은 ‘국제적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말한다. 한국식 비유를 덧붙이면 전 세계 극우들은 ‘빨간 약을 판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백인민족주의자들이 내놓는 최악의 빨간 약은 바로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확신이다.

2015년 미국 찰스턴 교회에서 총을 난사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홉 명을 살해한 딜런 루프가 “인종주의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애국주의”라고 한 말에 동의하는 극우단체 회원은 “이 생각을 퍼뜨리는 게,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빨간 약’을 먹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반(反)페미니스트들이 파는 빨간 약은 “여성은 섹스를 파는 판매자이고 남성은 구매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페미니스트나 리버럴을 악마화된 외집단으로 규정한다. 나치를 신봉하는 이들이 여성인권 운동 활동가들을 ‘페미나치’라 비난하는 자기모순도 보인다.

빨간 약은 텍사스 월마트 총기 참사의 범인 패트릭 크루시어스가 성명서에 언급한 ‘대전환 이론’과도 이어진다. 저자는 폭력을 선동하는 대전환 이론이 ‘위기 서사’의 ‘음모론’ ‘디스토피아’ ‘불순물’ ‘실존의 위협’ 네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유럽인은 인종과 문화가 전혀 다른 이민자들로 대체되고 있고(불순물), 그 배후에는 글로벌 엘리트, 이들과 공모한 정부, 기술 기업, 미디어 매체로 이뤄진 비밀 단체가 있으며(음모론) 그 결과 사회가 점차 부패하고(디스토피아) 결국 백인이 멸종한다는 것(실존의 위협)”이다. 율리우스 에볼라의 ‘계급, 인종, 신화, 종교, 의례에 기반한 사회·정치 질서’라는 비전도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 테러리스트와 네오파시스트에게 영향을 끼쳤다. 네오파시스트 단체 중 하나는 에볼라의 <폐허 속의 인간(Men Among the Ruins)>의 첫 자를 딴 ‘MAtR’을 단체 이름으로 정했다.

‘빨간 약’의 가장 큰 유통경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다. 메릴랜드대 연구원들은 2016년 한 해 동안 발생한 모든 급진화 사례의 90%가 SNS 플랫폼의 영향을 받았음을 발견했다. SNS가 막 등장했을 때 지하디스트 게시판의 회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페이스북은) 진짜 좋은 생각이야. 게시판보다 나아. (우리가) 가르치려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우리가 찾아가서 가르칠 수 있어! 별일이 없으면 무자헤딘과 지지자들. 그리고 자랑스러운 지하드 언론인들도 그렇게(그 사이트를 이용하게) 될 거야.”


인터넷과 SNS는 극우들의 사회화와 네트워킹, 정보전쟁이 벌어지는 장이다. “스크린 프린트와 초기 복사 기술의 발명이 파시즘의 발흥에 일조했으며 이런 기술이 미디어와 예술, 정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었다”는 발터 베냐민의 말 중 ‘초기 복사 기술’에 지금의 인터넷과 SNS를 대입해도 무리가 없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지금부터는 인종 전쟁”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채팅방은 암호화된 게임 메신저 디스코드에서 이뤄진다. 저자는 미국인 3명 중 2명이 SNS로 뉴스를 접한다는 퓨리서치센터의 2017년 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는 진실과 권력을 두고 다투는 온라인 전쟁을 낳았으며 인터넷은 정보의 격전지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온라인 커뮤니티가 급진화 입구이자 가속기 역할을 한다고 본다. 딥페이크 같은 인공지능 도구가 극단주의 온라인 캠페인의 전문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허위 정보는 뉴미디어를 통해 퍼져간다. 저자는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사실 정보를 왜곡하며, 핵심 쟁점에서 주의를 돌리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대안우파의 허위 정보 유포의 전략 네 가지 문제도 분석한다. 페이스북 같은 SNS의 부작용도 우려한다. 집단적 사고를 더욱 강화하고, 여러 집단이 서로 맞서게 하는 ‘우리 대 그들’의 틀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관계를 만들어내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배제, 차별,비난, 심지어 처벌을 부추기기도 한다. 저자는 페이스북이 불러온 디스토피아를 분석하며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는 늘 있는 일이다”라는 니체의 말도 인용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영화 <트위스터>를 보고는 폭풍의 속도와 힘, 예측 불가능성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고 한다. 극단주의 운동도 폭풍처럼 속도가 빠르고 매우 파괴적인 힘을 지녔으며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토네이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경고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폭풍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듯이, 저자는 같은 논리로 극단주의 운동 추적에 나섰다. 2년간 지하디스트부터 기독교 근본주의자, 백인민족주의자 등 5개의 정체성을 택해 10여개의 극단주의 집단에 직접 들어갔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목격한 혐오 콘텐츠의 규모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대했고 극단주의 운동에 참여한 젊은 사람들의 수는 낙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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