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돼지 뼈 발라먹는데 품위가 왜 필요해!

한겨레 2021. 11. 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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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감자탕
심야영업 금지 때 인기 안주
감자국에서 감자탕으로 개명
살집 많고 연한 목뼈 맛있어
감자탕.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대통령을 보니, 두가지 생각이 났다.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과 감자탕이었다. 둘 다 그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 범죄와의 전쟁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오던 시국을 우회 돌파하려던 정권의 꼼수였다. 조폭과 잡범을 잡아넣으면서 대중의 호응을 얻었고(‘후리가리’라는 은어를 썼다), 심야 술 판매를 금지했다. 12시면 딱 술집 문을 닫았다. 주당들에겐 통금이나 다름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사람들은 9시나 10시에 술잔을 놓아야 했지만, 어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책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음주 금지에는 사람들이 화를 냈다. 대중유화책이란 뻔한 꼼수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숨어들어 마셨다. 요새는 안주도 다양해서 뭘 먹을지 고민이지만, 그때는 별게 없었다. 감자탕이 딱이었다. 출출한 심야, 한잔 더 하는 술에 감자탕 말고 뭐가 있지? 하는 분위기였다. 더러 부대찌개도 있었지만, 감자탕이 앞줄에 섰다.

“족보도 없는 부대찌개 너! 존말로 할 때 뒤로 가라.”

부대찌개는 억울했다. 족보가 없다니. 하기야 미군 군번도 한국 군번도 없는 게릴라였다. 김치가 들어가니 김치찌개라고 우기면, ‘파주 문산식’은 김치가 거의 안 들어가서 일관성이 없었다(부대찌개 족보는 나중에 한번 파 드리고, 필살 안주로 공개하겠다). 결국 감자탕이 심야 불법 안주로 영광의 총대를 멨다. 군사정권과 감자탕. 이 절묘한 대비라니. 사람들은 감자탕 살을 발라 먹고, 더러는 부드러워진 뼈를 아작아작 씹으며 욕을 했다. 홧술을 마셨다.

그때 나도 감자탕을 즐겨 먹었고 법을 어겼다. 그 당시, 암막 커튼을 친 불법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독립군 같았다. 옳지 않은 법에 저항하는 우린 독립군이다! 반드시 새벽 4시까지 마셔서 합법을 쟁취한다!(4시면 다시 음주가 합법이 되었을 게다.) 얼굴도 분노의 독립군처럼 붉어졌다. 사실, 그때 불법 술을 마신 사람을 적발하기란 아주 쉬웠다. 옷에서 감자탕 냄새가 났으니까. 하지만 법이 정상 법이 아니어서 술을 마신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다.

감자탕은 원래 감자국이라고 했다. 1959년에 생긴 서울시 원조인 감자탕집 이름이 태조감자국이다. 내가 자랄 때도 감자국이라고 불렀다. 전문 감자국집이 많이 생긴 건 허름한 시장과 노동자 지역과 역전이었다. 용산역전이 유명했다. 용산역은 호남선 시발역이다. 그래서 감자국의 근원을 호남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감자국이던 시절에는 비교적 맑았다. 고춧가루를 좀 뿌리는 정도였다. 점차 국물이 진해지고, 무거워졌다. 감자가 쌀의 대용식이던 시절에는 아주 쌌다. 서민 음식인 감자국에 넣을 만큼 만만했다. 밭에 여러 특용작물이 심어지면서 감자 재배량이 줄었는지 어떤 때는 감자 안 넣은 감자국도 나왔다. 이때쯤 감자탕이 감자국이란 이름을 밀어냈다. 뭐든 탕이라는 더 강한 이름이 두드러지는 때였다. 갈비국도 갈비탕, 내장국도 내장탕, 개장국도 보신탕….

감자탕은 아마도 농민들의 돼지 추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날이 추워지고 잔치가 벌어지면 돼지를 잡는다. 여름 돼지는 잘 먹어야 본전, 냉장시설이 부족해서 잘 상했다. 잔치는 여름 농번기를 피해서 치른다. 돼지를 잡으면 구워 먹는 경우는 드물었다. 적은 고기를 많은 사람이 나눠야 하므로 주로 삶았다. 수육이었다. 여러 부속과 뼈를 푹 삶아서 배추시래기라도 넣고 더러는 양을 늘리기 위해 감자를 넣고 끓였을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수육을 건진 국에 잡뼈와 해조를 넣어 푹 끓였다. 몸국이라 한다. 그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아마도 감자탕은 몸국과 비슷한 인류학적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 같다.

도시에 감자국(탕)이 퍼진 건 역시 돼지를 본격 생산하기 시작한 1970년대다. 삼성이 에버랜드 땅에 돼지를 길렀을 정도니까. 미국에서 사료가 싸게 들어왔고, 기름 짜고 밀가루 만들고 남은 부산물이 또 좋은 사료가 되었다. 한때 소고기보다 비싸던 돼지고기가 드디어 대량 공급되었다. 민중은 삼겹살을 굽고, 순대국과 감자탕을 끓였다.

감자탕은 보통 돼지 등뼈로 끓인다고 알고 있다. 실은 목뼈도 들어간다. 우리 몸이 경추와 요추로 나뉘는 것처럼. 경추가 아프면 목디스크, 요추는 허리디스크다. 감자탕은 디스크와 그 주변부 살을 먹는 음식이다. 경추 쪽이 훨씬 맛있다. 살이 보들보들하고 살밥도 많다. 등뼈는 먹잘 거 없이 턱과 입만 아프다. 이거 뜯어 먹다가 뼈가 입가를 자극해서 쓰릴 때도 있다. 젓가락으로 점잖게 살을 발라 먹어 보자고 덤비다가는, 손가락이 저려서 혼난다. 특히 뼈 골수를 빼먹겠다고 젓가락을 쓰면 엄지 인대가 나가는 수가 있다. 남의 골수를 빼먹는 일은 역시 어렵다. 그걸 척척 해내는 어떤 인간들은 대단하다. 감자탕에서 최고의 부위는 다시 말하지만 역시 목뼈. 등뼈는 친구에게 인심 좋게 양보하라. 목뼈 중에서 납작살이란 게 있다. 목뼈에 수평으로 붙어 있는 부위인데 감자탕은 대량으로 먼저 끓이므로 국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감자탕집 주인도 이 살의 존재를 잘 모른다. 내가 시킨 냄비에 그 살이 붙어 있으면 횡재다. 살살 녹는다. 주인에게 엄지를 날려주시라.

직접 집에서 감자탕을 만드는 엄마들도 예전엔 꽤 있었다. 소뼈가 엄청 비쌀 때라 가족들 보양 삼아 만들어 먹였다. 뼈는 많고 살은 적으니 큰 들통을 써야 그나마 끓일 수 있었다. 나는 집에서 해 먹는다면 딱 살밥 좋은 목뼈만 산다. 이 살이 얼마나 인기가 좋으냐면 순살 덩어리인 뒷다리 살과 가격 차이가 없다. 거의 뼈인데도! 냉동한 적 없는 국산 돼지 뼈 싱싱한 건 피 안 빼도 된다. 한번 끓이면서 거품을 잘 걷어낸다. 서너 시간 끓여서 국물이 녹진녹진하고 살이 풀리면, 미리 삶은 감자를 넣고 고춧가루 풀고 미원이랑 파 넣어서 개운하게 먹는다. 감자탕 뼈를 뜯을 때는 술 마시는 게 참 품위가 없어진다. 손에 양념 묻은 채로 술잔을 잡는 일이란 게 그렇다마는, 감자탕을 손 안 대고 젓가락으로 깨작거리기엔 좀 그렇지 않나, 품위 따위는 포기하자.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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