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은지' 찾아 헤매는 미투 이후 한국 사회 그리는 정아은의 소설

김지혜 기자 2021. 11. 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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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정아은 | 문예출판사 | 400쪽·412쪽 | 각 1만5000원

미투, 여성의 몸, 성적 주체성, 모성, 인터섹스 등 젠더를 둘러싼 다양한 주제를 다룬 연작 소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와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을 펴낸 소설가 정아은. ⓒ채널예스


“유력 평론가 김지성, 미투 가해자로 지목돼”. 진영 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지식인이자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문학평론가이며 정치평론가 53세의 남자 김지성. 그의 몰락은 갑자기 찾아왔다. 포털을 도배한 기사들 속 지성은 하루아침에 ‘미투 가해자’가 됐다. 문법에 어긋난 조어지만 모두가 뜻을 알았다. 각계에서 쏟아져 나온 성폭력 피해 고발 속에 그의 가해가 증언됐다.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오랜 동료이자 유명 시인 민주는 고발 직후 세상을 떠났다. 지성은 술에 취했던 그날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진행하던 라디오, 칼럼을 연재하던 지면에서 퇴출당하고 단행본 출간과 교수 임용은 없던 일이 됐다. 소설은 묻는다. 지성은 진짜 이 사건의 ‘가해자’일까? 만약 아니라면, 그는 무결한가?

“통속과 품위의 경계에서 줄타기 하는”(2013년 한겨레문학상 심사평) 작가 정아은이 연작소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을 함께 펴냈다. 앞서 장편소설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등을 통해 계급 갈등과 욕망의 각축장으로서의 ‘직장’과 ‘잠실’을 묘파했던 정아은은 두 편의 소설을 통해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를 세태 소설의 문법으로 포착한다. 높아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와 해묵은 진영 논리 사이, 무엇이 ‘옳은지’ 여전히 찾아 헤매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 기묘한 연애담과 함께 드러난다. 정 작가는 기자와 통화하며 “못난 인간의 군상을 그대로 드러내 (독자로 하여금) 못난 모습을 직면하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대로 주인공들은 자주 “어리석고 위선적이며 비열”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계속 살아간다.

“그들은 김지성의 결백을 놓고 서로 의견 차이 때문에 ‘페절’을 선언했고, 서로 비난을 퍼부어댔다. 현실 속 제 삶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 남자의 성추문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비장하게 발언하게 만드는 힘. 그것은 인정욕구였다. 자신이 올바르고 올바르며 세상에서 제일 올바르다고 외치고 싶은 욕구.”(<그 남자…>) 작가는 두 책에서 올바름의 판단을 요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모래처럼 흩뿌려놓고, 그 속에서 길을 잃는 주인공과 대중의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 페미니스트를 자임했던 지성은 어느덧 ‘안티페미니즘 진영’으로 분류되는 남초 커뮤니티와 보수 언론의 비호를 받으며 “짐승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회복을 꾀한다. 지성은 혼란하다. 이 혼란에서 독자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소설 속에 담긴 ‘세태’는 독자가 살아가는 현실과 꼭 닮아있다.

<그 남자…> 이후의 시간을 다룬 <어느 날…>의 주인공은 지성의 집에서 43일간 ‘인간 고양이’처럼 살았던 40세 주부이자 작가 이화이이다. 화이는 지성을 모델 삼아 ‘카야’라는 필명으로 <지성인 K씨의 특별한 나날>이라는 소설을 써낸다.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쏟아낸 화이의 말은 매체의 성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편집된다. “주위 여성 착취하는 위선적인 남성 지식인들 단죄 주장한 카야”와 “페미니즘에도 브레이크 필요해. 안티페미니즘 입장 선명히 밝힌 카야”, 판이하게 다른 두 기사 제목에 화이는 거부감을 느낀다. 그가 한 말은 이랬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지만 “미투라는 사적이고 강력한 제재 방법이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정교해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미투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소멸시켜야 할 ‘악’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화이는 강간으로 임신해 결혼했고, 결혼 생활 내내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성적 대상으로 물화됐다. 그런 그가 성폭력 가해자 혹은 가해자일지도 모르는 지성과의 시간을 통해 엄마와 아내, 며느리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자신만의 삶에 가까워져간다. ‘악’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지성을 바라본 결과다. 하지만 생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랐을 때, 화이는 온몸으로 지성을 의심한다. 분노를 터뜨린다. 정 작가는 “자기 죄에 빠져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잉여의 감정을 갖게 된 두 남녀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올바르지도 평화롭지도 못한 소설 속 세계를 거니는 기분은 내내 껄끄럽다. 그럼에도 끝내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 보통 그런 모양이기 때문일 테다. 구저분한 만남은 원래 재밌다.

정 작가 특유의 통속과 품위의 경계에서, 두 소설은 통속 쪽으로 미끄러진다. 어떤 지향점을 담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생리와 매혹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충실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경계선이 불분명한 채로 살아가는 복잡한 인간들의 이야기다. 매일이 고발 일색인 포털 뉴스창을 볼 때마다, 소설을 통해 체득한 복잡한 생의 감각을 되새겨 볼 듯하다. 다만 이 소설이 혹여 미투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정 작가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그 부분이 우려가 되긴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만 이 운동이 힘을 받고 지속성을 지니려면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은 오류들을 안일하게 덮고 넘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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