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근속 노동자가 꿈꾼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저도 꿈꾸겠습니다 [은유의 책편지]

작가 2021. 11. 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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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144쪽 | 1만2000원


어제는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강연을 할 때 범죄경력조회동의서, 강연료지급서 등 여러 가지 양식에 서명한 스캔본을 e메일로 발송하곤 하는데 한곳에서 문서를 반드시 우편으로 보내라더군요. 수년간 여러 기관과 일했지만 원본을 요구하는 데는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럽고 조금 성가셔서 강연을 포기할까 하다가 그냥 보냈습니다. 삶에 고개 숙이는 마음으로요.

한 번씩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30여분 걸리는 우편물 보내는 일로 30분 넘게 갈등하고, 출판사에서 원고료 장당 1만원에 원고 청탁이 오면 20년째 동결된 고료는 부당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죠. 업무 용건을 불쑥 카톡으로 보내오면 소통 창구를 메일로 단일화해달라고 말할까, 그럴 시간에 답하고 말까 아니면 아예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할까 망설입니다.

이렇게 내가 나의 고용주이자 노조위원장이 되어 내적 협상을 벌이고 있노라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탈진해 버립니다. 하필 눈앞엔 수명을 다한 스탠드 전구가 방정맞게 시야를 흐리고 메일함엔 각각의 내규에 따른 서식과 온갖 필요에 의한 요청들이 웅성거려 그것을 처리하자니, 사람은 큰 사건으로만 침몰하는 게 아니라 작은 노동에 마모되어 소멸할 수 있구나 싶은 것입니다.

존재의 복원이 시급했습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깊은 사색에 대한 책,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폈습니다. “삼십오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라고 쓴 첫 문장부터 압도당해 빠져들었던 책이죠. 주인공 한탸도 “날마다 죽을 것만 같은 피로에 찢기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인물로 자아의 막대한 소진을 줄이기 위해 여느 노동자처럼 맥주를 들이켜는데, 책도 술처럼 마십니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책과 내가 하나 되는 에로스의 최대치로 읽는 기쁨을 표현하지요. 한탸는 실러, 휠덜린, 니체의 무덤이 된 폐지 꾸러미에서 책을 발견하고 한 줄씩 읽어 나가며 지식의 세계로 빠져들어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됩니다.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고 말하죠.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등과 표지를 발견하는 그 놀라운 순간을 (…) 축제”로 느끼는 사람,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책을 향유하는 사람. 처음 읽었을 땐 한탸가 대단한 애서가로 보였고 그저 부러웠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노동자 한탸가 보이네요.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순간 살아온” 35년 근속 노동자.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과 만나기 위해 나날의 의무를 다하죠. 종국에는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환경과 소장의 통고에 따르기보다 차라리 지하실에서 “승천”하는 길을 택하는 불복종 시민이기도 합니다. 책장을 덮고나니 서류 몇장에 압사당할 듯 괴로워한 제가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반복되는 문장입니다. 시대가 개인의 삶에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1914년 체코에서 태어난 보후밀 흐라발은 나치 치하에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철도원, 보험사 직원, 제철소 잡역부, 단역 배우, 폐지 꾸리는 인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흔아홉에 뒤늦게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의 자전적 경험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농축된 거죠.

어쩌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아무 걸림 없이 오직 읽고 오직 쓰는 삶이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근무조건이 열악해도 책에서 양식을 구하라는 식의 자기계발 논리는 아닙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 영혼의 본질을 살아가며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여정의 숭고함.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모순된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지성의 고귀함을 보여주죠.

여전히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살림과 육아와 집필이 늘 서로의 핑계가 되었던 어정쩡한 시기를 통과해 이제 좀 일에 몰입해보고 싶었으나 체력이 급저하됐고 프리랜서 작가의 노동 환경은 일관된 체계가 없어서 일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현기증이 일어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탸가 꿈꿨던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저도 포기할 수가 없네요. 매번 바뀌는 동료를 무도회장의 파트너처럼 다정하게 맞이하고 동시에 인간을 부품화하는 업계 구조엔 주저없이 저항하며 작가의 노동권을 사수하고 읽어야 할 것을 읽고 써야 할 것을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탸처럼 책 더미에서 조용히 몰락할 수 있는 생이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대상 없는 하소연과 반성문을 이만 마칩니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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