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대한민국 최악의 해양 참사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선장 탈출설, 그 진실은?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 그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그 배를 탄 사람들, 1993 서해훼리호'라는 부제로 1993년 10월 10일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를 조명했다.
28년 전 10월 10일, 현철 씨와 성회 씨는 공정거래 위원회의 직원들. 이들은 국정 감사를 끝내고 서해 변산반도의 작은 섬 위도로 낚시여행을 떠났다. 또한 경찰인 병길 씨는 동료들과 함께 위도로 부부동반 여행을 왔다.
기상 악화에 이들은 급히 육지로 나가려 했다.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배를 타야만 하는 상황. 이들은 작은 낚싯배 대신 110톤급의 여객선 '서해훼리호'에 승선했다.
오전 9시 45분 수많은 사람을 싣고 서해훼리호는 출항을 했다. 그런데 출항과 함께 파도가 심상찮았다. 파도를 피하기 위해 한쪽으로 몰리는 승객들, 10분쯤 지나자 이 커다란 배는 좌우로 기우뚱했다.
그리고 결국 이 배는 '푸드덕' 소리를 내며 바다 한가운데서 멈춰 서버렸고, 그 후 급속도로 배가 기울며 침몰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사람이 날아간다"라는 비명.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다 바다에 빠졌고, 몇몇은 간신히 갑판의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후 병길 씨와 현철 씨는 바다에 떠다니는 아이스박스를 붙잡고 한숨을 돌렸다. 또한 병길 씨의 아내는 가까스로 구명정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배가 완전히 침몰한 후.
그 시각 성회 씨는 선실에 갇혀 한 모금의 공기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과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선실 창문으로 뿌연 빛이 보였다. 성회 씨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창문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숨이 가쁘지 않고 몸이 나른해졌다. 성회 씨는 그 순간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그리고 그때 몸이 쑥 빨려 올라가는 느낌이 들고 성회 씨는 물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선실 창문 중 하나가 깨지면서 안에 있던 물들이 빠져나오며 성회 씨도 빨려 나온 것. 이후 성회 씨도 아이스박스를 붙들고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구조대. 가장 가까운 해경의 위치는 무려 1시간 거리. 생존자들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점점 잃어갔다. 그리고 이들은 눈앞에서 하나 둘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며 본인도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시각, 위도 앞바다에는 10톤급의 낚싯배 종국호가 손님 12명을 태우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전이 울렸고,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선장은 손님들과 함께 사람들을 구조하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손님들은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혼자 구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선장은 간곡하게 손님들을 설득했고 이에 낚시꾼들은 마음을 돌려 전원 모두 함께 구조를 위해 이동했다.
사고 발생 20분 후 사고 현장에 도착한 종국호. 하지만 그곳은 이미 참혹했다. 배는 흔적도 없고 시신의 바다가 된 곳에서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어디선가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종국호는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생존자들을 한 명 두 명 구조했다. 종국호가 구조한 사람만 총 44명.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 없는 종국호, 그리고 그때 여기저기서 어선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무려 46척의 어선이 구조를 위해 나섰고 이들은 목숨을 걸고 총 70명을 구조했다. 병길 씨는 바로 그 70번째 생존자. 그런데 마지막 생존자가 배에 오를 때까지 해경은 도착하지 못했다.
위도에 도착한 생존자들. 병길 씨는 함께 했던 아내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내도 구명뗏목 덕분에 목숨을 구해 무사히 재회했다. 그러나 병길 씨 내외가 함께했던 동료 부부들 중 총 4쌍이 사망, 성회 씨와 현철 씨는 13명의 일행 중 3명만 구조되었다. 또한 한 가족은 일가족 33명이 함께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된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 그 사고는 생사는 둘째치고 배에 승선한 사람들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매표소도 없었던 위도에서 서해훼리호는 배 안에서 표를 판매해 누가 탔는지, 정확하게 몇 명이 탔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여객선 회사 140명, 경찰은 200명 승선 인원에 대한 주장도 제각각, 이에 가족들이 직접 실종 신고를 하고 가족의 시신이 인양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다음날부터 해군, 해경, 어선까지 총동원된 인양 작업. 실종자 가족들은 위도로 올라오는 시신을 일일이 확인하며 가족을 찾았다. 또한 시신이 내 가족이 아니면 함께 딸려온 아이스박스에 내 가족의 흔적이라도 남아있는지 찾았다.
그런데 그때 들려온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다. 서해훼리호의 선장과 승무원 7명이 전원 탈출했다는 것. 이에 검찰은 위도를 원천 봉쇄하고 승무원들 검거에 나섰지만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전국에 지명 수배를 내리고 이에 수많은 제보가 쏟아졌다. 그리고 본인이 선장이라며 억울하다 호소하는 한 통의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선장이라 주장한 이는 방송국에 가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자수하겠다고 했지만 약속한 장소에 선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선장이 생존했다는 이야기에 선장의 가족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가족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연락 온 적도 없다"라고 항변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고에 대한 충격과 분노는 선장과 선원 가족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이후에도 시신 인양은 계속됐고, 사고 발생 나흘째 확인된 사망자만 138명. 생존자 70명을 합하면 이미 여객선의 정원을 넘어선 상황, 하지만 아직도 시신을 못 찾은 가족들이 넘쳐나 시신 인양은 계속됐다.
사고 발생 5일째, 한 곳에서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됐고 이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시신의 정체는 바로 시신의 정체는 바로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이었던 것. 생존해있다는 무성한 소문과 달리 이들은 모두 숨진 채 발견된 것이었다.
조타실에서 발견된 세 사람은 충분히 언제든 탈출이 가능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그동안 수많은 비난을 모두 받았던 것이었다. 충격적인 소식에 선장 아내는 실신했고 선장의 딸은 기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살아있다고 했으니까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장 생존설 보도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오보로 기록됐다. 그리고 이 오보는 당시 위도 파출소로 발령받은 새로운 직원이 선장과 너무 닮아서 착각한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기자들이 팩트 체크도 않고 기사를 쓰고, 다른 매체들은 받아쓰기로 기사를 양산한 것이었다.
또한 검찰은 "선원 7명이 일치하여 약속이나 한 듯이 생존자 명단에도 안 들어가고 사망자 명단에도 안 ㄷ르어깄다는 것은 의심스럽지 않나"라며 선장과 승무원을 검거하기 위해 나섰고 이에 생존설은 썰이 아닌 사실이 됐다.
언론과 검찰이 만들어낸 생존설이었던 것이다. 이에 NCT127 도영은 "보도에 대한 무게감이 무거잖냐. 기사를 써도 몇 명이 봐야 되고 일찍 보도해야 하고 이런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모든 사건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냐. "왜 이렇게 계속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잘못된 언론 보도를 꼬집었다.
국민의 귀와 눈이 선장을 향한 비난으로 쏠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는 놓치고 있었다. 서해훼리호는 대체 왜 침몰했나 하는 것.
서해훼리호의 정원은 승객 207명에 승무원 14명, 총 221명이다. 그런데 실제 총 승선 인원은 362명으로 141명을 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낚시로 유명해진 위도에 낚시꾼이 몰려들었지만 배는 하루에 한 번만 운항한 여객선 서해훼리호. 이에 정원을 초과해 운항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위도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에 서명까지 받아 관계 부서를 모두 찾아 탄원을 내고 배를 증선 해달라고 했지만 해운항만청을 비롯한 관계 부서들은 이를 모두 무시했다. 특히 해운항만청은 44만 8천 원의 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에 증선이 불가하다고 밝혀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모두 '설마 사고가 나겠어'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대처했다.
사고 당일 서해훼리호에는 멸치액젓 600통 등 화물 중량도 6톤을 초과했다. 하지만 이를 관리하는 이는 없었다. 수많은 설마들이 모여서 대형 참사를 가져온 것이었다.
사고 후 첫 생존자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에 장도연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나 비난받아야 될 사람들이 아닌 피해자들이 죄의식을 느끼고 미안해하는 상황이 안타깝다"라고 답답해했다.
생존자, 희생자 가족들도 현장을 모두 떠난 가운데 임영복 씨만 홀로 남았다. 그는 일가족 33명을 한 번에 잃은 유가족이자 119 구조대원으로 구조 요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해훼리호 마지막 실종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사고 23일째 사고 현장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임영복 씨의 아버지 시신. 이에 그는 "찾아서 다행이다 하는 마음이었다. 너무 오래 물속에 있어서 시계나 반지를 보고 겨우 확인했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이날 이야기꾼들은 200여 명 이상 희생된 대한민국의 여객선 참사를 돌아보았다. 1953년 창경호 사건을 시작으로 2014년 세월호 사건까지 20년 주기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정부는 재발방지 대책을 최우선으로 내놓지만 20년이 지나면 또 참사는 반복됐다. 이에 장성규는 "설마가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설마가 설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설마 OO 하겠어? 가 아니라 설사 안전하다 하더라도 한번 더 보고 한번 더 신경 쓰고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장현성은 "7년 전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그때가 2014년 4월 16일인데 만약 20년 후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지금 이 자리의 사람들은 너무나 부끄러울 것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장도연과 장현성은 어떤 사고에 몇 명이 사망했다가 아닌 1명이 사망한 일이 수백 번 일어났다고 생각해보라며 "한 명 한 명의 간절한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다면 쉽게 잊고 반복되는 사고들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라며 모두에게 하나하나의 이야기로 기억되어 다시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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