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시험을 안보니.. 사설 학력평가 난립

박세미 기자 2021. 11.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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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정모(11)양은 올해 상반기 한 교육 출판 사기업이 주관하는 ‘수학 학력 평가’에 응시했다. 응시료 3만원을 주고 60분간 25개 수학 문제를 풀고 나왔다. 성적표에는 본인 점수와 전국 평균 및 석차 백분율, 지역 평균과 석차 백분율 등이 적혀 있다. 정양 어머니는 “학교에서 제대로 시험을 치지 않으니 내 아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이런 시험을 치고 있다”고 했다.

전국 초등학교에서 중간·기말고사가 사라지고, 코로나 유행 이후 학력 격차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사설 학력평가 시험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아이의 학업 수준을 확인하고자 하는 수요는 큰데 학교에서 시험을 치지 않으니 ‘학교 밖 시험’에 몰리는 것이다.

천재교육은 올해 처음으로 초등학생 대상 ‘전국 국어 학력평가’를 신설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시험장에 들어가 40분간 30개 문항을 푼다. 올해 첫 시행이지만 응시하고 싶다는 문의가 폭주했다. 비상교육은 지난해부터 초등학생 대상 학력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메가스터디는 2019년부터 초등학생 대상 전국 단위 학력평가를 실시 중이다. 교육계에서는 전체 초등학생 중 5% 정도인 10만~15만명이 매년 이 같은 사설 시험에 응시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대학도 뛰어들었다. 연세대·고려대 등 서울 주요 대학들이 앞다퉈 초등학생 대상 전국 단위 학력평가를 치르고 있다.

사교육 기업들은 한결같이 “전국 단위로 실시되는 시험을 통해 아이의 학습 수준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주겠다”고 홍보한다. 올해 처음으로 초등학생 대상 ‘영어·수학 학력 경시대회’를 치른 에듀테크 기업 NHN에듀는 시험을 치고 나면 응시자의 성취도를 AI(인공지능)가 분석한 성적표를 제공한다. 에듀테크 기업 아이스크림에듀도 전국 단위 수학학력평가를 치르면서 전국 석차와 성취도가 담긴 분석표를 주고 있다.

학생·학부모들이 사설 시험에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중간·기말고사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좌파 교육감들은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면 안 된다”며 시험을 폐지했다. 지금은 교과서 한 단원이 끝나면 간단한 단원평가만 치른다. 또 중학교 1학년은 ‘자유학년제’로 1년간 아예 시험을 치지 않는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전국 단위로 치러지던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를 표집(전국 학생의 3%)으로 바꿨다. “학업 성취도 평가는 학교·학생 줄 세우기”라는 전교조 등의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학부모들이 많이 가입한 온라인 카페에는 “초등학교 때 ‘잘한다’는 학원 말만 믿고 있다 중2 첫 중간고사 성적을 받아들고 애랑 같이 펑펑 울었다”는 경험담이 수시로 올라온다.

시험을 등한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학생들의 학력은 지난 4년간 계속 하락하고 있다. 정부가 6월 발표한 ‘2020년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 결과’에 따르면, 중학교 수학의 경우 기초 학력 미달 비율이 13.4%로 2017년(7.1%)의 2배 가까이 늘었다. 중학교 국어는 2.6%에서 6.4%, 영어는 3.2%에서 7.1%로 급증했다.

김경회 명지대 석좌교수는 “학교 시험 폐지는 결국 사설 시험 시장만 키우게 될 것”이라며 “이 같은 현상이 심화하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사설 시험이 난립해 신뢰도를 보장하기 어려워질 경우 학생·학부모들이 시간과 돈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공교육에서 학업 성취도 점검을 하지 않는 데 따른 가장 큰 피해는 사설 시험조차 치기 어려운 저소득층 아이들이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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