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2배속 인생
“하루 종일 영상 시청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맨날 영화 보고 드라마 보는 게 왜 힘들어요? 저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학교 과제를 위해 내게 ‘직업 조사’ 인터뷰를 하던 초등학생 조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취미이자 여가인 영상물 시청이 고역이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월급 받는 직장의 일이라면, 아무리 좋은 취미라도 강도 높은 노동으로 바뀌고 만다. 페인트칠이 재밌다며 친구를 속여 넘긴 톰 소여라면 모를까, 마냥 재미로 화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30만편 이상 에피소드를 보유한 웨이브 아카이브에는 매월 3000~4000편의 신작이 업데이트된다. 콘텐츠 큐레이터는 그 수많은 작품들이 어떤 장르이고, 시청자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나 분위기는 어떤지, 시대 배경과 촬영지는 어디인지 등을 꿰고 있어야 한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부족한 영역을 채워준다고 하지만, 콘텐츠는 기술이 따라올 수 없는 감성(感性) 영역이 훨씬 크다. 예를 들어, 기분 우울한 날 ‘재미있는 드라마’를 시청하고 싶은데 추천 알고리즘이 그저 코미디 장르만 추천한다면 신뢰를 잃고, 얼마 안 가 가입자까지 잃을 것이다. 그럴 때 콘텐츠 큐레이터라면, 컴퓨터가 찾지 못하는 ‘위로’ ‘힐링’ ‘반전’ 등의 속성을 담은 ‘동백꽃 필 무렵’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드라마를 추천할 것이다. 문제는 절대적인 시청 시간이 확보돼야 한다는 점. 하루 종일 영상을 시청해도 24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이동하는 버스나 지하철 안, 화장실, 심지어 잠들기 직전까지 노동(?)은 계속된다. 그 결과가 고도화된 콘텐츠 데이터베이스 구축으로 귀결되고, 머신러닝에 기반한 추천 시스템의 근간이 된다.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의 시간을 갈아 넣어 머신러닝 기계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역은 시즌 22까지 있는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이나 70회나 되는 ‘연희공략: 건륭황제의 여인’ 같은 작품들을 만날 때. 2배속으로 돌리면서, 대신 더 집중해 시청하기도 한다. 오늘 뭐 보지? 고민 중인 당신을 위해, 콘텐츠 큐레이터들은 이렇게 2배속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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