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쩌허우(1930-2021), 중국 개혁개방 시대에 숨결 불어넣은 사상가

박은하 기자 2021. 11. 3.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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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개인의 자유와 점진적이고 꾸준한 사회개혁을 강조했던 현대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 리쩌허우(李澤厚)가 3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리쩌허우의 제자 자오스린은 리쩌허우가 2일(현지시간)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숨졌다고 말했다고 신경보 등 중국 매체들이 전했다. 신경보는 고인에 대해 1980년대 미학 열풍 속에 중국 청년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 받았고, 지식계에서의 영향력이 지대했다고 전했다. 천안문 사건 후 망명 생활을 했지만 중국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철학자이자 미학자로서 1989년 프랑스 국제철학아카데미에서 동양인으론 유일하게 원사(院士)로 위촉돼 라캉·데리다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평가받았다.

리쩌허우는 1930년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태어나 1954년 베이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교수와 전국인민대표대회 교과문형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화혁명 기간이던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허난성의 농촌으로 하방됐다.

문화혁명이 끝난 1970년대 말부터 왕성한 저작활동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배격된 칸트를 남몰래 읽으면서 1979년 ‘비판철학의 비판’을 완성했다. 독일 관념론을 통해 문화혁명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문화혁명으로 황무지같던 중국 사상계에 비판이론의 좌표가 된 저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중국근대사상사론’(1979년), ‘중국고대사상사론’(1985년), ‘중국현대사상사론’(1987년)은 리쩌허우 중국사상사론 3부작으로 불린다. 1981년 출간된 ‘미의 역정’은 선사시대부터 청대까지 예술의 변화상을 살피며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규명한 책으로, 1980년대 중국 대학생들 사이에 이 책을 필사하고 통째로 외우는 것이 유행할 정도로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국 현대사의 지성 흐름을 ‘자유와 구망(救亡)의 이중주’로 표현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전통 청산의 ‘계몽’ 운동은 봉건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망’하는 과제와 맞물리면서 계몽이 구망에 밀려났고, 중국은 개인이 중심이 되는 근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양무운동의 구호였던 중체서용(중국의 몸에 서양의 옷)을 비틀어 서체중용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신계몽주의 사조로 불리며 1980년대 개혁·개방을 지지하고 서방의 자유주의를 수용하려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중국현대사상사론’ 등을 번역한 임춘성 목포대 교수는 “리쩌허우는 마오쩌둥이 실천했던 ‘구국운동이 계몽의 과제를 압도했던 혁명’을 비판했다”며 “중국 개혁·개방 시기 비판사상의 시원”이라고 평가했다.

리쩌허우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 공산당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무시하지 말고 귀 기울이라’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해 당국으로부터 시위 교사범으로 지목됐다. 이후 그는 중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콜로라도대 등에서 연구와 강의를 병행했다.

리쩌허우가 생각하는 현대 중국이 나아갈 길은 1996년 홍콩에서 출간된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소장 류짜이푸(劉再復)와의 대담집인 ‘고별혁명’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20세기는 신해혁명, 공산주의 혁명, 문화혁명 등 큰 사건들을 겪으면서 오직 혁명만이 역사발전의 계기라거나 혁명은 신성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리쩌허우와 류짜이푸는 21세기 중국의 길은 혁명보다 개량의 길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개량은 혁명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개량은 사회변화를 위해 지속적이고 점진적이며 장기적으로 수행하는 노력으로, 타인을 ‘반동’이라 몰아붙이거나 ‘자아비판’을 강요하지 않고 이성으로 설득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만에서 1999년, 한국에서 2003년 출간됐다. 중국에서는 아직 정식 출간되지 못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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