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존엄과 팔짱?

한겨레 2021. 11. 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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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임재성|변호사·사회학자

불쾌함보다는 의아함이었다. 공권력이 나에게 팔짱을 풀라고 명령하는 2021년의 상황. 조용해야 할 법정 방청석에서였지만, ‘왜요?’라는 반문은 머리가 아닌 몸에서 나왔다.

지난 9월30일 오후, 의뢰인의 선고를 듣기 위해 서울남부지방법원 408호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재판부가 낭독하는 내 의뢰인에 대한 선고 이유를 팔짱을 끼고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법정 경위가 어깨를 쳤다. 팔짱을 풀라는 몸짓을 했다. 왜 푸냐 질문했고, 경위는 말로 ‘법정에서는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건 이유가 아니었기에 ‘규정 있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팔짱을 끼면 안 된다는 명문 규정이냐’ 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확인시켜달라 했고, 가지고 오겠다 했다. 거짓말이었다. 팔짱 행위를 특정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위는 다시 오지 않았고, 선고가 끝났기에 의뢰인과 법정을 나섰다.

의아함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방청석에서 팔짱을 끼는 행위가 도대체 재판의 진행에, 법정의 질서 유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아무런 영향 없다. 법대 위에 앉은 판사들을 향해 방청석의 시민들은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불경한 자세는 안 된다는 ‘군기 잡기’일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법정 경위의 과도한 언행이었겠지 생각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에 민원을 넣었다. 팔짱 끼는 행위가 법정에서 금지되는 행위인지 확인해달라, 만약 금지되지 않는다면 사과와 재발 방지 교육을 해달라 요청했다.

두번의 민원접수 끝에 10월14일 받은 남부지원의 공식 답변이다. “법정에서 당사자나 방청인이 팔짱을 끼고 있는 경우 팔짱을 풀 것을 요청하는 것이 법원 경위의 통상적인 업무방식임을 알려드립니다.” 꽤 명확한 답변이다. 알려드립니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방청석에 앉은 시민들은 팔짱을 낄 수 없습니다.

법원의 시대착오적인 입장은 확인되었으니, 이유를 찾아보자. 무엇을 위해, 법정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어야 하는가. 법정 질서와 관련된 유일한 법률 조항인 법원조직법 제58조 2항은 ‘법정의 존엄과 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는 사람에게 질서유지에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① ‘법정의 존엄’ 또는 ② ‘법정의 질서’를 위해 강제력 행사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가만히 앉아 조용히 팔짱을 끼는 행위와 ‘질서’는 상관이 없다. 결국 ‘법정의 존엄’이다. 법정의 존엄을 위해, 팔짱은 안 된다.

존엄의 사전적 의미는 ‘감히 범할 수 없는 높고 엄숙한 성질’이다. 통상 사람, 생명, 인권 같은 단어와 어울린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신성함’과 유사어다. 대한민국 법률 중에 ‘존엄’을 사람이 아닌 대상에 사용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다. ‘법정의 존엄’과 ‘국립묘지의 존엄’. 국립묘지 역시 묻힌 망자에 대한 존중이기에, 결국 사물에 존엄이 붙은 경우는 법정이 유일하다. ‘법정의 존엄, 신성함을 위해 자세를 단정히 하라.’ 이유조차 시대착오적이다. 만약 대학교에서 어느 교수가 ‘내 수업은 신성하니 팔짱 끼는 사람은 강의실에서 나가라’라고 한다면 당장 징계다.

팔짱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헌법은 재판의 공개를 원칙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중요한 수단이다. 엔(n)번방 사건 등으로 촉발된 ‘디지털 성착취 사건 재판 방청 운동’이 최근 사례이다. 질서 유지와 아무런 상관없는, 방청자의 자세나 복장을 이유로 방청을 방해하거나 법정에서 쫓아낸다면, 이는 공개재판 원칙의 침해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문제에는 사법부의 삐뚤어진 권위의식이 집약되어 있다. 재판거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피고인석에서 종종 장시간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있다고 한다. 그 어떤 판사가 그의 자세를 지적했나. 양승태도 팔짱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신성하게 포장하기 위해 ‘단정한 자세’ 운운하면서도, 정작 권력자들에게는 한마디 못 하는 꼴이 희극이어서다.

두가지 요구가 있다. 먼저, 법원의 지침을 바꾸시라. 법정에서 팔짱을 끼든, 다리를 꼬든 제한될 이유가 전혀 없다. 다음으로, ‘법정의 존엄’과 같은 법문도 바꾸시라. 사법부의 권위는 법정에 온 시민들의 복장과 자세에 몽둥이를 댄다고 높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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