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위선에서 불안정 노동, 파괴된 갯벌까지..서혜경의 '구운 흙으로 그린 한국사회'

김종목 기자 2021. 11. 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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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어느 선생님께서 ‘작품에 형식만 있다. 미술 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내용도 없는 작품을 내놓을 수 있냐’고 하셨죠.”

서혜경은 2019년 초 연 개인전 때 한 미술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꽃과 숲을 소재로 한 서정성이 강한 작품을 내놓을 때다. 서혜경은 이 말에 충격을 받아 1년 반 가량 작업을 못 했다고 한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서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 ‘사람, 가장 위험한’ 전(11월14일까지)에 그 결과물을 담았다. 그 중 하나가 한국 민중미술 대표 작가인 ‘오윤(1946~1986) 오마주’ 연작이다.

‘오윤 오마주’ 연작. 김종목 기자

서혜경은 2019년 말 ‘오윤 오마주’를 두고 이렇게 썼다. “그(오윤)는 내게 질문하고 일깨우고 있었다. 변화의 시대에 인간 본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불만을 품은 이들, 억눌리고, 구속되고, 무시당한, 불확실성 속에 내팽개쳐져 억압받고 종속된 사람들을 관찰하라고. 작가이자 노동자의 삶을 습득하라고.”

‘오윤 오마주’는 삼등 분할 작품이다. ‘오윤 오마주 2’에서 서혜경은 삼등분 화면 아래엔 오윤의 판화를, 중간엔 오윤 판화를 양분 삼아 자라는 화초를, 위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와 나비들을 새겼다. 총 7점의 ‘오윤 오마주’를 출품했다.

‘불확실성 속에 사는 불안하고 억압받는 존재를 담은 게 ‘파랑새는 있다’이다. 새벽 인력 시장에 나온 일용직 노동자 두 사람을 붉은 흙판에 새겼다.

서혜경, ‘파랑새는 있다’. 김종목 기자

‘사람, 가장 위험한’이란 전시 제목은 일련의 연작에서 따왔다. 한국 사회의 여러 절망적 현실을 구워냈다. ‘놀다 가세요’는 성매매 여성의 인권 문제를 다룬다. 불합격 통지서를 부여잡고 망연자실하는 청년들로 하여금 실업 문제를 환기하는 작품이 ‘청년’이다. ‘가족’에선 ‘부자 할아버지’와 ‘무관심한 아빠’ 곁에서 ‘정보력 많은 엄마’, ‘그 뒤를 좇는 아들’의 형상으로 ‘입시 문제’를 환기한다. 서너 살 된 아이를 한 손에 안은 임산부 얼굴은 일그러졌다. 작품명은 ‘내 아이들의 미래는’이다. 한국 지식인의 이중성과 위선 문제를 담은 ‘함께 춤을 추어요’도 내놓았다.

서혜경, ‘함께 춤을 추어요’. 서소문성지박물관 제공
서혜경의 ‘청년’. 서소문성지박물관 제공

작품은 모두 테라코타 기법으로 만들었다. 작품 옆 캡션마다 ‘조형토 1150℃ 산화소성’ 같은 말이 붙어 있다. 가까이서 보면 양감이 두드러진 작품이 멀찌감치 떨어져 보면 평면 회화 같다. 덕성여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서혜경은 테라코타 작품을 ‘구운 흙으로 그린 회화’로 정의한다. 그는 “어린 시절 흙으로 소꿉놀이하던 기억들 때문에 테라코타에 강하게 이끌린 것 같다”고 말한다. 성지박물관의 붉은 벽돌로 이룬 벽은 테라코타 작품을 전시하기에 최적의 공간 같기도 하다.

서혜경, ‘못 박힌 산’. 김종목 기자
서혜경, ‘천박한 도시’. 김종목 기자

테라코타 작품은 다른 매체보다 균열이 더 쉽게 난다. 서혜경은 의도적으로 균열을 내기도 했다. 이 균열은 세상의 파괴를 뜻하는 듯하다. 능선 듬성듬성 파고든 아파트와 능선에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를 두고 각각 ‘못 박힌 도시’, ‘천박한 도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연의 흐름을 끊어내는 지금의 파괴를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으로 진화·변화하는 생명체·유기체로 파악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Gaia) 이론’에 영향을 받은 작품도 냈다.

서혜경, ‘가이아-소녀’. 김종목 기자

‘가이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지의 여신’을 부르던 이름이다. ‘소녀-가이아’에선 흰 저고리, 파란 치마를 입은 소녀를 등장시켰다. ‘여신’은 생명의 죽음 때문에 고통으로 신음한다. 손바닥엔 대못 하나가 박혔다. 서혜경은 “위안부의 모습도 겹쳐넣은 것”이라고 말한다. <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 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든 여신 ‘여와’의 형상을 빌어온 게 ‘지어주신대로’이다. 신화와 현실의 공통분모 중 하나가 여성주의다.

‘새만금 연작’은 여성, 환경에 관한 문제 의식을 집약했다. 서혜경은 이 연작에서 해창 갯벌에서 조개를 캐내는 여성의 노동을 그렸다. ‘가이아-여신’의 소녀와 ‘지어주신대로’의 여와 ‘새만금 연작’의 여성이 ‘생명’, ‘여성 고통’이란 키워드로 이어진다.

‘새만금 연작’ 앞에 선 서혜경 작가. 김종목 기자

서혜경은 2020년 9월 새만금문화예술제에 작가로 참여했다. 이 예술제 모토는 “방조제를 뚫어 새만금을 살려내라”였다. “그 드넓은 갯벌이 다 뭉개졌어요. 썩는 냄새가 진동했어요. 조개도, 철새도 사라졌습니다.” 그 충격과 옛 새만금에 관한 기억을 ‘새만금의 추억’ 1·2와 ‘해창 갯벌의 생태도’ 3점에 담았다. 이전 전시보다 직설적 작품을 많이 내놓은 이번 초대전에서 사회성과 서정성을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새만금 연작’은 자족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혜경은 오윤의 영향으로 여러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올해 ‘고래살리러가자’, ‘미얀마민주시민을 위한 미술행동’ 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작가들은 하나의 주제, 화풍을 오래 이어간다. ‘꽃’에서 ‘노동’, ‘환경’ 같은 주제로 전환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사회 이슈를 다루는 작가들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서혜경의 작품은 더 돋보인다. 권진규 이후 테라코타 작업을 하는 이들도 드물다는 점에서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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