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고 장렬한 남성의 노래

2021. 11. 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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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여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내와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250㎞ 떨어진 암보셀리 국립공원에 가서 석 달을 머물렀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의 백년설이 보이는 곳이다. 그의 단편소설 중 백미인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은 그 3년 후 출간됐다. 그가 집필했던 집은 그대로 보존돼 관광명소가 됐다.

이 소설은 1952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모정’의 감독 헨리 킹이 연출하고 당대의 미남미녀 배우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가 주연했다.

소설은 술과 돈과 여자에 탐닉했다가 갑자기 죽음의 기로에 선 한 작가의 삶을 그린다.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 패혈증에 걸린 주인공.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참회하며 인생의 의미를 되찾아가는 내용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킬리만자로는 높이 1만9,710피트의 눈에 뒤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이다.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누가예 누가이’ 즉 신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는 얼어붙은 표범의 사체가 하나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던 것인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표범은 왜 그 춥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랐을까. 그 정상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원래 표범은 아열대 정글에 적응해온 동물이므로 만년설이 덮인 고원에 올라갈 이유가 없다. 문학평론가들은 킬리만자로는 어떤 ‘이상향’의 상징이며 표범은 그 이상향을 좇아 방황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조용필 8집 앨범. 처음으로 조용필의 자작곡이 한 곡도 없는 앨범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자켓 타이틀로 했다가 그 다음에는 ‘허공’으로 바꾸었다. 김희갑-양인자 부부가 만든 5곡이 실려있다.

작곡가 김희갑-작사가 양인자 부부가 1985년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조용필의 8집에 줄 때까지만 해도 킬리만자로는 우리에게 낯선 산봉우리였다. 조용필은 2001년 킬리만자로를 알린 공로로 탄자니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8집에는 ‘허공’ ‘그 겨울의 찻집’도 실렸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킨다. 대중가요로선 특이한 제목, 파격적이며 문학적인 노랫말, 도입부와 노래 중간중간에 긴 독백이 삽입된, 기존에는 찾아볼 수 없던 음악 문법이었다.

이 노래에 다른 가사가 붙었다면 지금처럼 유명한 곡이 됐을까.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젊은 양인자는 신춘문예에 계속 낙방하면서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는 언젠가 등단하게 되면 그 소감으로 쓰리라고 일기장에 글을 써놓았다. 그게 바로 이 노래 가사가 됐다. 실패와 좌절, 고독과 야망을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표범에 빗댄 이 가사는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분명하다.

이 노래만큼 ‘수컷스러운’ 노래가 있을까. 힘든 하루를 마치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삶의 고단함과 회한에 겨워 목청을 뽑아대든, 아니면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내일의 희망과 야망을 다짐하며 불러제끼든 간에 이 노랫말의 기조는 철저한 남성적 고독이다. 운명을 걸어야 하므로 사랑이 외로운 것처럼, 남자가 모든 것을 건다는 건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상남자’ 최민수가 무명 시절 눈발 날리는 한계령을 넘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는 벅찬 감동에 휩싸여 차를 멈추고 끝까지 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는 것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첫 소절에서부터 사내의 숨은 턱 막힌다.

이 노래를 부르는 여자는 못 봤다. 많은 사내들이 노래방에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때 이 노래에 도전한다. 길이 6분. 보통 노래의 두 배 길이다. 자칫하면 분위기 망치는 선곡이다. 고음에 고난도, 숨가쁘게 이어지는 빠른 내레이션으로 웬만큼 부르지 못하면 욕 먹기 십상이다. 80점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누군가 분위기 살려 정말 멋지게 부르면 좌중을 초토화시키며 모두 떼창으로 합세한다.

가사에 등장하는 단어들. 초라, 야망, 하이에나, 도시, 불빛, 불행, 바람, 이슬, 불꽃, 영혼, 허전, 등, 위안, 사랑, 화려, 청춘, 건배, 21세기…이 실체 없는 단어들은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듯하면서도 동의어다.

한때 질풍노도의 푸르른 청춘이 있었건만, 출세와 양명과 치부에 목숨 걸듯 헤엄쳐온 지난날들, 지느러미가 찢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포기할 수 없던 이 풍진 세상살이…왜, 무엇을 위해, 어디를 오르기 위해, 그리 애를 썼단 말인가.    

묻지 말지어다.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몰라준들 어떠랴. 나는 오늘도 배낭을 멘다.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다 한들 또 어떠랴.

노랫말은 하이에나와 표범을 대비시킨다. 하이에나는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비루하지만 현실타협적 남성이다. 표범은 도시의 화려한 불빛 아래 야망을 불태우지만 고독한 남자다.

다시 주먹을 쥔다. 도시 한복판에 버려진다 해도 하이에나처럼 초라하고 타락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할 터다.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얼어죽은 표범처럼 고독하게 매진하다 장렬하게 산화해 21세기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가 될 터이다. 살아생전에는 이름을 얻지 못했지만 죽은 후에야 명성을 얻은 고흐처럼.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질지언정 빛나는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 한 줄기 맑은 물소리로, 꺾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로 남을 것이다.

강렬하다 못해 장렬한 열망만이 고독과 허무를 초탈하는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가슴으로 포효하는 장대한 서사시다.

2016년 출판사 더클래식이 펴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 양인자가 노랫말을 쓴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모티브가 됐다.

이 노래는 발표하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중가요의 노랫말로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분량도 지나치게 길고 노래와 독백이 반복되는 구조여서, 실험적 노래를 선보이려던 작곡가 김희갑이 조용필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음반이 나오자마자 한국의 남자들을 사로잡은 불후의 명곡이 됐다.

김희갑은 1979년 ‘창밖의 여자’를 내세운 조용필 1집에 수록된 ‘잊혀진 사랑’을 시작으로 조용필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아내 양인자와 함께 대한민국 중년 여성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그 겨울의 찻집’(1985), ‘바람이 전하는 말’(1985), ‘큐’(1989), 무려 20분에 달하는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1989) 등 조용필의 명곡을 탄생시켰다.

소설과 시를 쓴 문인 양인자는 1980년대 문학성과 대중성이 뒤섞인 독보적인 대중가요 작사가다. 남편과 함께 ‘타타타’(김국환), ‘사랑의 미로’(최진희), ‘알고 싶어요’(이선희), ‘립스틱 짙게 바르고’(임주리)를 만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될 뻔했던 ‘서울 서울 서울’은 조용필이 작곡하고 양인자가 작사했다(주제가는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

김희갑의 말에 의하면, 양인자는 마음속 깊은 감정을 한 번쯤은 속 시원하게 내뱉고 싶은데 작사는 리듬에 맞춰 간단하게 표현해야 해서 그게 늘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를 만들면서 쓰고 싶은 만큼 마음껏 가사를 쓰라고 했고 그 결과 독백이 절반을 차지하는 긴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전편에 소개한 ‘봄날은 간다’에 이어 시인들이 뽑은 좋아하는 노랫말 2위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사 양인자/작곡 김희갑/노래 조용필

(독백)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노래)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독백)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노래)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독백)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 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노래)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 라… 라… 라…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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