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이야기일수록 철저히 문학적이어야"

박동미 기자 2021. 11. 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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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를 그린 장편 ‘제비심장’을 펴낸 김숨 작가. 백다흠 제공

■ ‘철’ 이후 13년만에 조선소 소재 소설 ‘제비심장’ 펴낸 김숨

가혹함속 언어의 아름다움 빛나

정제된 문장으로 이야기 풀어내

“노동자·강제이주민·위안부 등

책 펴낸 뒤에도 그 소설 다시 써

그 이야기와 나 깊은 인연인듯”

“어느 시기부터 통제하기 힘든 습관이 생겼어요. 소설을 탈고하고 책으로 펴낸 뒤에도 계속 그 소설을 쓰는 것이에요.”

소설가 김숨이 ‘철’ 이후 13년 만에 다시 조선소 이야기를 썼다. 붙들린 것에서 쉽사리 놓여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김 작가는 데뷔 작품 두 편을 14년 후에 개작해 새로 출간하거나, ‘위안부’ 피해자 증언 소설 연작 다섯 권을 묶어내기도 했다. 신작 ‘제비심장’(문학과지성사)도 이 독특한 이력에 한 줄을 보탠다. ‘철(鐵)의 사랑’ ‘철(鐵)이 노래할 때’ 등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소설을 장편으로 엮었다. 집요하게, 그리고 새롭게. ‘다시’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이야기와 내가 깊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요.” 최근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한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비심장’은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뒤쫓는다. 같은 노동자를 세 부류로 나누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 외국인 이주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등장 등 이야기는 김숨 표 ‘노동소설’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노동자 투쟁 속에 여성의 자리라곤 없었다는 사실, 한국의 가장 험한 노동 현장의 위험을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게 싼값에 외주했다는 사실도 확인해야만 했다. ‘철’을 썼던 김숨이 다시 한 번 조선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정황은 그렇게 이해된다.”(김형중 문학평론가) 김 작가는 벌써 “새롭게 발생하는 이야기, 꼭 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메모하고 있다”고 했다. ‘제비심장’을 펴낸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다.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건 6년 전이다. 최초의 조선소가 있다는 도시에 내려가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일하는 동안엔 통화가 불가능했고, 갑자기 잔업이 잡혔다며 두 번 연속 김 작가를 바람맞혔다. 짧고 불안했으나, 강렬한 만남 후 ‘제비심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하나하나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녀 또래 조선소 여성 노동자들을 더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스물네 시간을 지켜보고 싶었죠. 길고 힘겨운 노동 이후에 짧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남편과 아들딸들은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작품의 주 배경은 ‘철상자’로 불리는, 조선소에서 만드는 철배의 조각이다. 무게가 2∼3t 나가는 철판을 이어 붙여 더 큰 철판을 만들고, 그 철판을 짜 맞춰 철상자를 만든다. 60여 t에 달하는 철상자 300여 개를 연결하면 철배가 탄생하는 것. 소설 속 노동자들은 평생을 철상자 안에서 보내지만 철배를 본 적이 없다. 철상자 안에서 길을 잃고, 병들고, 아프고, 죽는다. 가혹한 현실을 배경으로 했으나, 소설 속 인물들의 말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답다. 노래처럼 리듬을 탄다. 시(詩) 같다. “방금 내 얼굴로 뭔가 떨어졌어.” “불티는 아니야. 불티는 반짝이니까.” “벌레 같았어. 내 이마를 바늘처럼 톡 찌르고 날아갔어.” “뜨거웠어?” “뜨겁고, 따갑고, 뾰족하고, 날카롭고.” 쇳가루로 얼굴이 온통 잿빛이 된 두 남자가 철판 위를 걸어가며 나누는 대화다.

‘떠도는 숨’에서는 강제 이주 고려인을, ‘한 명’에선 ‘위안부’ 생존자를 기억하고 증언한 김 작가는 “피해자들의 이야기일수록 더 정제된 문장으로, 처절함도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게 예의다”라고 말해왔다. “소설을 쓰기 위해 만난, 또 만나고 있는 분들이 더해질수록 ‘철저히 문학적’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더 기우는 것 같아요.” 덜 정제된, 그러니까 ‘날것’의 쓰기를 한 적도 있다. 김 작가는 “그 시기 ‘쓰기’가 지금보다 즐겁지 않았다. 그 시기에 쓴 글들을 좋아할 수 없었고, 지금도 좋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겐 공포감 같은 게 있었다. 글로 쓴 문장이 아닌, 입으로 말한 문장이 목소리와 함께 저장돼 어떤 곳에서 떠도는 것 말이다. 그런데 올 들어 세 차례나 영상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김 작가에겐 코로나19로 인한 가장 큰 변화다. 특별히 일상은 바뀐 게 없다. 이날 그는 단편소설을 퇴고하고, 밥을 지어 늦은 점심을 먹고, 우체국에 들러 세 통의 우편물을 발송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새 세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는 걸 봤고, 멀리 있는 어떤 호수를 그리워하다 밤을 맞았다. 그러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오면 쓰기 시작한다”는 말처럼, 어느새 다음 소설을 쓰고 있겠지. ‘위안부’ 생존자, 고려인, 그리고 조선소 노동자…. 김 작가에게 ‘가 닿은’ 다음 사람이 몹시 궁금하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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