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오후 네 시의 풍경 하나

- 2021. 11. 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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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였다.

아파트 중앙분수대 산책통로에 그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두툼한 털실로 짠 흰색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미색 스웨터를 걸친 그이는 오후 네 시 무렵, 일정한 시간에 산책통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네 시 무렵, 아파트 산책통로에서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처럼 힘들게 걷기 연습을 하는 그이가 좌절하지 않고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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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였다. 아파트 중앙분수대 산책통로에 그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두툼한 털실로 짠 흰색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미색 스웨터를 걸친 그이는 오후 네 시 무렵, 일정한 시간에 산책통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이 옆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동행자가 있었다. 그들은 그이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잡고 그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넘어지거나 주저앉지 않도록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무척 힘들고 위태로워보였다.

그랬다. 그이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다. 걸음만 불편한 게 아니라 팔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신체에 마비가 온 듯했다. 걸음걸이도 걷는다기보다는 끄는 것에 가까웠고, 한걸음 내딛는 것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동행한 이는 그이가 한걸음을 내디딜 동안 채근하거나 불평하는 일 없이 말없이 기다려 주었고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그 모양을 훔쳐보는데 나도 모르게 코끝이 매웠다. 고마웠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상으로 나온 그이도 고마웠고, 부축하고 잡아주고 버팀목이 돼주는 그 동반자도 고마웠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신체의 한 부분이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린 그이의 움직임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그랬으니까.

어느 여름, 아버지는 깊은 낮잠에 빠져있었다. 그 잠이 하도 달아 보여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 차려놓은 점심상이 꾸덕꾸덕 말라가자,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는 황급히 119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고, 위험하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깨어나셨다. 하지만 오른쪽이 마비됐고, 아버지는 그 뒤로 집에만 칩거하셨다. 화가에게 오른쪽의 마비는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창문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염없이 밖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알 수 없다. 회한으로 가득한 지난날을 반추하고 계시는지, 반신불수의 몸을 슬퍼하고 계시는지. 그때 햇빛 환한 날, 운동 삼아 아버지를 부축하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한걸음 내딛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또 버팀목이 돼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이 없다. 그저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미워만 했을 뿐, 고단했을 아버지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위해 당신의 삶을 희생하고, 자식을 키울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존재로서, 아버지가 성취하고 싶었던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여리고 길을 잃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오후 네 시 무렵, 아파트 산책통로에서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처럼 힘들게 걷기 연습을 하는 그이가 좌절하지 않고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아버지에게 꼭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뒤늦은 이 말이 아버지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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