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도시'로 지방소멸에 맞서자

한겨레 2021. 11. 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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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이원재ㅣLAB2050 대표

우연찮게도 지난 몇년간 방문했던 지역의 상당수는 인구감소지역이었다. 정부가 시·군·구 89곳을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해 지원하겠다고 지난 10월18일 발표하는 장면을 보고, 그때 만났던 공직자와 청년과 주민들을 떠올렸다. 지역에 거주하는 한 개인에게, 또는 지역에 살다가 떠났거나 살러 이주하려는 개인에게, 지방소멸이란 어떤 문제일까?

동향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고향의 이름이 사라지는 정서적 문제일 수 있다. 지역의 유구한 전통이 사라지는 문화적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특정한 영역의 국토가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다거나, 또는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의 자리가 줄어드는 행정적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살거나 그곳으로 이주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늙고 아플 때 돌봐줄 사람도, 내가 키우는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사람도 없어진다는 것 아닐까?

지역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가져오는 문제의 핵심은 ‘돌봄의 소멸’이다. 자동화의 시대이고 메타버스의 시대이지만, 돌봄은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붙어 있으면서 감당해야만 하는 일로 남아 있다. 사람이 사라지면 돌봄도 사라진다. 돌봄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진다. 인구 감소가 가져오는 가장 큰 공포는 지역 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나를 위한 돌봄의 소멸’이다. 정부는 지방소멸대응기금 1조원을 만들어 지원하겠다지만, 돌봄소멸의 위협을 먼저 거둬내지 않는다면 100조원을 들여도 지방소멸은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지방소멸 대책은 많이 시도됐다. 지역마다 청년 지원 정책, 귀촌 지원 정책, 출산 지원 정책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고령화와 인구감소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군 단위뿐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 같은 광역시들도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왜 그럴까? 대부분 정책이 지역 간 인구쟁탈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다. 지역 간 인구경쟁은 누군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제로섬 게임일 뿐이다.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서, 지방소멸을 ‘돌봄소멸’로 인식하는 데서 다시 시작해보면 어떨까. 지방소멸 정책의 초점을 ‘지방’에서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다. 돌봄은 국가 차원에서도 큰 문제다. 정부는 ‘돌봄의 국가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돌봄 관련 제도의 규모는 빠르게 커지고 있다. 2008년 생긴 노인장기요양보험은 연간 10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로 커졌다. 2013년부터는 보편적 무상보육도 실시 중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치매 국가책임제도 시작됐다. 국가가 제공하는 돌봄서비스는 260가지나 되고, 성인돌봄 재정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의 1%에 육박한다. 이는 오이시디(OECD) 국가 평균의 3분의 2 수준이며, 증가 속도가 워낙 빨라 곧 추월할 전망이다.

하지만 개인들의 짐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지는 않다. 노후는 여전히 불안하다. 장기요양보험 서비스를 한번 받으려면 까다로운 선별 심사 과정과 야박한 서비스 시간에 좌절하게 된다. 무상보육이 전면화되었지만, 여성들은 ‘경단녀’ 신세를 면할 길이 너무 좁다.

문제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국가 책임’이라지만 개인에게 국가는 너무 멀고 찾기 힘들다. 문제가 하나 생기면 부처로, 공단으로, 지자체로 개인이 알아서 찾아다녀야 한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까다로운 조건만 제시하는 담당자를 몇번 만나고 나면, 이내 포기하고 민간 요양병원과 돌봄기관으로 향하고 만다. 결국 책임은 개인에게로 넘어온다.

패러다임을 바꿔서, 이 돌봄 책임을 지방자치단체가 가져오면 어떨까. 돌봄의 ‘국가 책임’을 ‘지역 책임’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지역에서 생기는 돌봄 문제의 최종 책임을 지자체가 지도록 하면 된다. 동시에 지자체가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 보육·주거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합해 활용하며 새로운 정책도 실험할 수 있도록 권한을 넘겨줄 수 있다. 인구감소로 위기를 겪는 지역이라면 더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안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든 돌봄 걱정이 전혀 없는 ‘돌봄도시’를 시범적으로라도 만들어보자. 중앙정부에는 중요한 정책실험이 되고, 지방자치단체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돌봄 수요는 급증하고 있으니, 괜찮은 통합돌봄체계를 구축해낸다면 그 자체로 혁신이고 새로운 경제이기도 하다.

돌봄소멸을 막겠다는 원칙을 가져야 지방소멸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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