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세상의 저녁] 도스토옙스키, 영혼의 심원한 사냥꾼

한겨레 2021. 11. 2. 18: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찬의 세상의 저녁]도스토옙스키는 왜 소설을 그토록 치열하게 썼을까?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만 그에게 소설이 구원의 행위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이 구원이 아니었다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그가 소설을 그토록 치열하게 쓴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ㅣ소설가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콘스탄틴 모출스키는 도스토옙스키를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냉혹한 천재”라고 하면서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질서 체계를 서사화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질서 체계 밑에서 꿈틀거리는 카오스를 서사화했다”고 평가했다. 1821년 11월1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881년 2월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면한 도스토옙스키는 신예작가로 주목받던 28살 때 급진적 정치 모임 참가로 투옥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집행 직전 감형되어 8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살이를 하는 등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적 카오스, 더 나아가 인류의 카오스를 서사화하는 데 환각을 주요 질료로 썼다. 그의 환각이 형성하는 관념은 인간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비밀을 밝히려는 데 집중한다. 그가 보여준 집중적 열정은 세계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심원하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의 예술적 열정이 탁월하게 표출된 작품들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제시한 관념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 사실을 깨닫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허무적 초인사상이다. 살인까지 정당화하는 사상의 폭주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꿈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뿐이 아니다. ‘구석구석에 거미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그을음투성이의 작은 방’이 영원일 수도 있다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고백을 통해 영원이라는 신비한 관념을 비루하게 파헤쳐 놓는다. 꿈의 끔찍함과 영원의 비루함이라는 혁명적, 반어적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의 심연 속에 풀어놓은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이 실을 따라가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만난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죄의식의 뿌리를 추적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주친다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독일어 증보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서문으로 수록된 <도스토옙스키와 아버지 살해>에서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는 작가이자 신경증 환자였고,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자로서의 윤리주의자이자 죄인이었다”고 썼다. 프로이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지금까지 쓰인 소설 가운데 가장 장엄한 소설”이라고 극찬하면서도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작가의 내면에 내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영락한 시골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성질이 까다롭고 인색했으며, 가부장 의식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아버지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증오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억압된 욕망은 현실에서 자양분을 얻지 못하면 사라진다. 반대로 현실이 억압된 욕망을 충족시킬 때, 즉 환상이 현실로 변할 때 위험이 찾아온다. 1839년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 그에게 학대를 받아 원한을 품고 있었던 농노들이 그를 죽인 것. 환상이 현실로 변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열여덟살 때였다.

“범죄자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애정은 끝이 없었다. 그 애정은 불행한 자에 대한 동정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눈에 범죄자는 그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을 과오를 짊어진 속죄자로 비쳤다. 이러한 그의 애정은 고대인들이 간질환자나 광인들을 보면서 느꼈던 성스러운 공포를 연상시킨다.”

프로이트는 위의 글에서 환상이 현실로 변할 때의 위험에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이 얼마나 깊이 침윤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는 자는 자기 학대가 필연이다. 프로이트의 눈에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은 자기 학대의 결과로 보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의 간질 발작은 응징의 의미를 지닌다. 즉 누군가가 죽었으면 바랐고, 스스로 그 대상으로 변해 발작이라는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발작 상태에서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을 “세계의 모든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말 속에 그의 존재론적 신비가 깃들어 있다. 도박벽도 마찬가지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으려고 도박했다. 돈을 몽땅 털렸을 때 병적인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내는 “마지막 재산까지 저당 잡혔을 때 남편의 소설 쓰기가 가장 잘 진전되었다”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쓰기는 그가 스스로에게 가한 응징으로 죄의식이 해소되었을 때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소설을 그토록 치열하게 썼을까?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만 그에게 소설이 구원의 행위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이 구원이 아니었다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그가 소설을 그토록 치열하게 쓴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그에게 소설이 왜 구원이 될 수 있었을까? 소설이 지니는 허구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이 축조하는 공간은 현실 세계가 아니다. 허구의 세계다. 허구의 인물이 숨을 쉬고, 허구의 삶들이 세계를 채운다.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라스콜리니코프도, 아버지를 살해하는 스메르자코프도, 열두살 소녀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스타브로긴도 모두 허구의 존재들이다. 이 어둡고 불행한 허구의 존재들 가운데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백치>의 므이시킨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다.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인물 가운데 이들은 대단히 희귀한 존재다. 이들의 내면에 아이(천사)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순수한 영혼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깊은 애정과 아련한 동경이 아프게 느껴진다. 죄악으로 황폐화된 세상 속으로 두 순수한 영혼을 작가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보낸 듯한 느낌까지 든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는 현실 자체가 감옥이다. 아무리 도주해도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혼이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는 갇힌 존재다.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를 갇힌 존재로 보았다. 갇힌 존재는 자유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현실은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란 그에게 불가능한 세계다. 불가능을 견디지 못하면 환각으로 빠져들거나 자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환각은 자살하지 않고도 감금의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피신처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자살 대신 환각을 선택한 것은 인류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