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 71년만에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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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새벽 2시.
인천시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2일 월미도공원에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인천시는 위령비를 인천상륙작전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월미도 동쪽지역의 민간인 거주지가 완전히 파괴돼 실향민이 생겼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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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뉴스1) 강남주 기자 = 1950년 9월15일 새벽 2시. 인천 월미도 앞바다 미군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했다.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을 무력화하기 위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당시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킨 ‘한방’이었던 이 작전에서 100여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71년만에 월미도에 세워졌다.
인천시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2일 월미도공원에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위령비는 과거사위의 진실규명 결정에 따른 권고사항을 반영해 인천시가 건립했다.
인천시는 위령비를 인천상륙작전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박남춘 시장은 “위령비를 통해 다시 한 번 원주민 희생자의 영령을 추모하며 남겨진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사위는 지난 2008년 조사를 벌여 인천상륙작전으로 민간인이 희생된 사실을 밝혀냈다. 희생자 수는 신원이 확인된 사람 10명을 포함해 총 1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희생은 과거사위 조사를 통해 밝혀졌지만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아픔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월미도 동쪽지역의 민간인 거주지가 완전히 파괴돼 실향민이 생겼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실향민들은 1952년부터 줄기차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직후에는 미군이 주둔한다는 이유로, 미군 철수 이후에는 육군이 주둔한다는 이유로 관철되지 못했다. 실향민들은 당초 이 땅이 자신들 소유였다고 주장했지만 전쟁통에 이를 입증할 자료들이 사라져 인정받지 못했다.
인천시는 50여년간 군부대가 주둔했던 이 땅을 2001년 국방부로부터 매입해 월미공원을 조성한 상태다.
inamju@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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