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대선서 무시 못할 ‘설거지남’

한경진 기자 2021. 11. 2.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온라인 커뮤니티 ‘4chan’(포챈)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거센 바람이 불었다. 포챈은 변변한 직업이 없고, 연애를 하지 않으며,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백인 남성 니트족(청년 무직자)’의 집결지 같은 곳이다. 이 사이트 정치 게시판에서는 역차별받고 소외됐다고 느껴온 이들이 모여 테러리즘 찬양, 인종 차별 같은 혐오 발언까지 쏟아내곤 했다.

다큐멘터리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포챈의 아이콘이었던 개구리 캐릭터 ‘페페(pepe)’를 ‘네오나치’의 상징이라고 저격했다. 트럼프는 거꾸로 행동했다. 자기 얼굴과 개구리를 합성한 사진을 뿌리며 이들에게 화답한 것이다. 영향력도, 자금도, 연줄도 없었던 백인 니트족은 이후 트럼프 강성 지지층을 자처했다. 방구석에서 폭발력 있는 정치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을 만들어 내며 트럼프 당선에 기여했다.

최근 우리 온라인 커뮤니티를 휩쓴 ‘설거지남’ ‘판교 신혼부부’ 같은 말을 보면 포챈 사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밀레니얼 세대가 마주한 욕망과 절망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설거지남’은 20대 때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한 채 군복무와 취업 관문을 어렵게 뚫고 수도권 외곽(이른바 ‘퐁퐁시티’)에 간신히 전셋집을 마련한 3040 남성이, 젊은 시절 다른 사람과 실컷 연애를 즐긴 아내에게 경제권을 내주고 현금인출기(ATM) 취급을 받는 것을 조롱한 표현이다. 현재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남녀 갈등을 넘어 ‘미혼 도태남’과 ‘기혼 퐁퐁남’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판교 신혼부부’는 부모님 지원으로 구입한 판교 아파트에 거주하며, 인근 빅테크 기업에 다니는 부부를 말한다. 조롱 표현인 ‘퐁퐁시티 부부’와 달리 선망과 호감이 담겨 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야경. /박상훈 기자

이런 용어가 흥미로운 건 군대·취업·연애·결혼·부동산·젠더 문제는 물론 부의 세습, 화이트칼라 일자리 감소, 정보 기술(IT) 분야 직업을 가진 뉴칼라(New Collar)의 부상 같은 시대상이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30대 남성 미혼율(50.8%)이 역대 최고치를 찍고(통계청 2020년 조사), 은행 가계 대출 증가분 50.7%가 2030세대로 나타난 요즘, 네티즌이 빚어낸 유행어에는 청년 세대의 불안과 불만이 숨 쉬고 있다.

설거지남이나 판교 신혼부부를 언급한 대선 주자는 아직 없다. 지난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경험했듯, 청년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어젠다로 부상했다. 그런 면에선 포챈을 비난한 클린턴과 달리 초록 개구리로 변신해 그들을 달랬던 트럼프의 감각이 무서울 지경이다. 과연 어떤 후보 메시지가 도태된 청춘에게 가장 와 닿을까. 정치의 계절,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