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움직여 1차대전 참전시키고.. 이스라엘 세울 땅 80%를 샀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1. 11. 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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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22]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하] 세계가 그들 손에
궁전 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 여름별장 -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의 전쟁통에 한발 앞선 정보력으로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후 유럽 각국의 공채 발행을 맡으면서 국제 채권시장을 창출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영국 버킹엄셔의 워데스던 저택(Waddesdon Manor·사진)은 세계 금융을 호령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지금도 매년 40만명 안팎의 관광객이 찾는다. 내부엔 냉·온수 수도와 전기 등 당대 최고 기술이 적용됐는데, 1890년 저택을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이 전구 샹들리에에 감명받아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면서 10여 분을 보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1815년 워털루전쟁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어 공채 발행 실권을 장악했다. 이는 곧 영국의 통화 공급량과 채권 금리를 로스차일드가 좌우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817년 프로이센은 런던 로스차일드가 프로이센 공채 발행의 주간사 은행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유럽 각국이 로스차일드에게 공채 발행을 의뢰했다. 이로써 런던 채권시장이 글로벌화에 성공했다. 그 무렵 프랑스 혁명 이후 폐위됐던 왕들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나 각국에서 전쟁 채권이 대량 발행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런던의 유대 금융인들이 이를 사들이며 채권 가격이 오르자 시중금리는 떨어졌다. 이렇게 채권시장이 활성화되어 유럽 전역과 러시아가 하나의 채권시장이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경제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국제 채권시장의 창출이다. 이는 저금리 환경으로 이어져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투자자로 가득한 19세기 런던 주식시장 - 19세기 초 런던 증시를 묘사한 판화.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사들였다’는 말을 듣게 되는 시기다. /위키피디아

◇ 세계 자본시장을 금본위제로 견인

유럽 주요국에 진출한 로스차일드 다섯 형제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 점이 유럽 전체를 묶는 글로벌은행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금융의 역사를 보면, 워털루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금융시장이 세계화되었고 주식시장이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상사의 글로벌화는 많은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대인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로스차일드가 아예 게임의 룰을 바꿨다고 했다. 금융 중개 업무 수준의 은행이 아니라 외환시장의 국가 간 장벽을 허물어 금융시장의 성격을 글로벌하게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차일드는 세계의 금광들을 사들여 국제 금 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영국을 1819년 세계 최초의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서구 전체를 금본위제로 끌어들였다. 1872년 독일을 필두로 1878년 프랑스, 1879년 미국, 1881년 이탈리아, 1897년 러시아를 금본위제에 합류시켜 세계 주요국들을 모두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금 가격 등 중요 결정권을 그들이 주도했다.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각국 통화를 상품으로 보고 형제들 간 네트워크를 활용해 무위험 차익거래로 꾸준히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외환 시세를 주물러 환차익을 얻는 투기에도 열을 올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각국 정치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활용해 산업혁명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10년간 전후 복구 사업과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본 조달을 위해 이전 100년 동안의 유가증권보다도 더 많은 양의 유가증권이 발행됐다. 자본시장이 발달하자 저금리가 정착됐고, 투자가 활발해지며 산업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후 그들은 대규모 자금이 드는 철도의 유럽 대륙 전파에 앞장섰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 유럽 대륙 최초의 철도를 깔았다.

◇ J P 모건 가문과 美 연준 설립 참여

미국이 산업혁명 초기에 빨리 진입할 수 있었던 데에도 유럽 자본, 특히 로스차일드 자본의 덕이 컸다. 당시 미 정부 국공채는 물론 제2 미합중국은행 주식의 많은 양을 그들이 샀다. 이렇게 많은 양의 미국 채권과 주식을 사들이자 1837년 미국 피바디 은행이 미국 상업은행 최초로 런던에 문을 열고 거래를 중개했다. 훗날 이 은행의 공동 경영자로 참여했다가 런던 피바디 은행을 인수한 사람이 J P 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이다. 이렇게 로스차일드 가문과 JP 모건 가문의 관계가 시작됐다. 그 뒤 런 던 로스차일드가 JP 모건과 합작 설립한 지주회사 노던증권이 미국 산업과 금융의 돈줄이 되었다. 1913년 JP 모건이 주도한 미국 연준 설립에도 로스차일드계 은행들이 대거 참여했다.

건국의 주역, 에드몽과 라이어널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정착할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에드몽 로스차일드(왼쪽)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낸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오른쪽). /위키피디아

1881년 러시아 국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 조사 결과 암살범이 유대인 처녀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음이 알려지자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때 23만 명의 유대인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유대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1882년 프랑스의 대랍비 사독 칸은 러시아 랍비 사무엘 모히레버를 데리고 에드몽 로스차일드를 찾아와 러시아의 참상을 전하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몽은 두말 않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이어 암셸의 아들 중 프랑스를 맡았던 막내 제임스의 아들이었다. 그 뒤 그는 은행 일은 형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시오니즘 운동에 뛰어들어, 팔레스타인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뒤에서 도왔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66년 전인 1882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농장용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 사이먼 샤머 교수가 쓴 ‘두 명의 로스차일드와 이스라엘’에 따르면, 이스라엘 영토의 80% 이상이 에드몽이 사준 땅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에드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유대인이 유랑민으로 지낸 2000년의 세월 동안, 에드몽 로스차일드에 버금가는, 또는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을 발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카이사레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에드몽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쓰여 있다. “이 땅의 아버지 에드몽 로스차일드 남작과 그의 부인, 하느님을 높이 받든 여인 아델하이드 남작 부인 여기 잠들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항복을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영국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 회동,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1917년 4월 2일 미국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에 이르고, 그로부터 불과 4일 만에 특별한 사유도 없이 미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 뒤 11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정착지를 마련할 것을 호의적으로 숙고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른바 ‘벨푸어 선언’이다. 하지만 이는 다급한 영국의 상충된 약속이었다. 영국은 1차 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맥마흔 서한’을 이미 1915년 아랍권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이로부터 잉태되었다.

◇ 은행·본사 외부엔 명패도 안 달아

히틀러의 정치적 부상은 로스차일드 일가에 치명적이었다. 히틀러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빈의 로스차일드는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에드몽, 로벨, 앙리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하고 맨몸으로 추방당했다. 희생자도 나왔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어머니 쪽 가문은 대부분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고, 필립 남작의 아내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수용소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나치에게 혼이 났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2차 대전 이후 철저히 베일 뒤로 숨었다. 그들의 은행과 본사 건물 외부에는 명패조차 달지 않는다. 이후 가문의 자산은 비밀주의에 가려져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른다.

로스차일드 5형제의 대활약

장남은 통일독일 재무장관
차남은 오스트리아 고위직
셋째는 세계 금융계 거물로
넷째는 이탈리아 금융 접수
막내는 프랑스 돈줄 흔들어

마이어는 헤센-카셀 공국 군주 빌헬름 9세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자 다섯 아들들을 활용해 다국적 금융업을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섯 아들을 유럽의 중요한 다섯 도시에 단계적으로 파견했다. 첫째 암셸은 프랑크푸르트 본가에 남겨두고 둘째 솔로몬을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으로 궁정에 집어넣었다. 셋째 네이선은 섬유 비즈니스를 위해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졌다.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로 보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이었던 차남은 빈, 넷째 칼만은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기업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다.

큰아들 암셸은 나중에 통일 독일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다. 차남 솔로몬은 빈에서 최고의 직위에 올랐고, 셋째 네이선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금융인이 되었다. 넷째 칼만은 이탈리아 금융을 장악했고 막내 제임스는 프랑스에서 공화정과 왕정에 걸쳐 금융계에 군림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좌우명은 ‘화합(Condordia), 진실(Integritas), 근면(Industria)’이었다. 이는 유대교 경전 ‘토라’와 ‘탈무드’가 디아스포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핵심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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