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신진서와 박정환..한한 결승전의 역사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2021. 10. 3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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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프로 승부는 국제 대결이 국내전보다 인기가 높다. 같은 나라 선수들끼리의 승부에 비해 응원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의 프로복싱이 그랬다. 세계 타이틀전이 열리는 시각 거리는 한산해지고 골목길 주택가엔 TV중계 응원 소리로 떠들썩했다.

지난해 열렸던 남해 슈퍼매치 7번기에서 대국 중인 박정환(왼쪽)과 신진서. 신진서가 7판을 모두 승리했다. /한국기원

바둑 종목 역시 국제전 주목도가 국내 타이틀전의 그것을 압도한다. 이창호 대 창하오, 이세돌 대 구리, 박정환 대 커제전 같은 명승부의 중계 시청률은 웬만한 인기 드라마 못지 않았다. 그 옛날(이라야 반세기 전이지만) 조치훈 대 서봉수의 한·일 전화대결 때의 열기는 그보다 더했다. 안국동 4거리에 설치된 대형 해설판을 수 백명의 바둑팬들이 에워싼 채 열광했다.

요즘 바둑의 인기는 예전에 비해 못하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예능, 오락, 게임, 스포츠 등 다양한 대체 상품에게 공간을 침식 당했다는 분석도 맞지만, 내 생각엔 바둑의 국제화 실패가 더 큰 원인이다. 수 천년 역사를 지닌 인류 지능의 집대성임을 매번 강조해왔을 뿐 확장에 실패했다. 제대로 된 바둑 프로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한 중 일 대만 4국뿐이다. 구미(歐美) 자본주의 강국들을 끌어들이지 못해 흥행 순위에서 최하위권 종목으로 밀렸다. 메이저 바둑대회 우승 상금이 테니스나 골프 대비 10%가 약간 넘는 구조다.

그나마 일본과 대만의 실력이 한 수 쳐지다 보니 국제대회 최고 카드라고 해야 매번 한중전이다. 한 쪽으로 쏠리다 보면 한한 결승, 중중 결승도 속출한다. 이번 삼성화재배까지 메이저 대회는 총 121회 열렸는데 세부적으론 한중전 50판, 한일전 16판, 한한전 24판, 중중전 20판, 일일전 4판, 중일전 6판, 중·대만전 1판으로 집계됐다.

한한전 24판에 이어 중중 결승도 20판이나 벌어졌다. 지난 5월 미위팅(왼쪽)과 셰커가 제4회 몽백합배를 다투고 있는 모습. /한국기원

‘형제 대결’이란 이름 아래 한한 결승이 가장 많았던 대회가 26년째를 진행 중인 LG배다. 첫 회부터 이창호와 유창혁이 결승서 만나면서 시작된 LG배의 동족상잔(?)은 작년까지 25회 중 9번 발생했다. 36% 비율이다. 한한 결승뿐 아니라 중중 결승도 5회나 됐다. 전체 결승의 절반 이상이 동국인 대결로 채워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동국인끼리의 결승이라고 해서 무조건 외면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윔블던이나 마스터스, 전미 오픈처럼 세계적 중계가 안 되는 마당에 나름대로 화제는 풍성했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처음 세계 정상을 놓고 겨룬 2001년 제5회 LG배는 한국바둑 에이스의 위엄과 17세 소년의 당돌함이 정면 충돌한 역사적 명승부로 기록됐다. 선제 2승을 올리고도 3연패로 물러났던 이세돌은 2년 뒤 7회 LG배 결승서 다시 만나 기어이 혁명을 완성했다.

2003년 제8회 LG배를 놓고 결승을 펼칠 무렵의 목진석(왼쪽) 현 한국대표팀 감독과 이창호 9단. 이 9단이 3대1로 이겨 우승했다. /한국기원

2003년 제8회 LG배 때는 이창호와 현 국가대표 팀 목진석 감독이 결승을 벌이기도 했다. 12회 때는 이미 거목으로 큰 이세돌에게 겁없이 도전장을 던진 19세 괴물 한상훈이 주목받았다. 박정환과 김지석이 만난 2014년 19회 대회는 세계 메이저 바둑대회서 한국 랭킹 1위와 2위가 패권을 겨룬 최초의 무대로 기록됐다.

최근들어 가장 시끌벅쩍했던 한한 결승전은 지난 해 2월 막을 내린 24회 LG배가 꼽힌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그 대회는 신진서에겐 대관식, 박정환에겐 왕위 이양식에 해당했다. 박정환은 이후 신진서를 상대로 치른 6번의 결승서 모두 패해 2인자 지위를 굳혀가고 있다.

같은 국가 기사끼리의 결승전은 긴박감은 덜 하지만 대신 가슴 졸이며 조바심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최고의 콘텐츠와 최상의 결과 2가지가 모두 보장돼 있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1일부터 결승에 돌입하는 제26회 삼성화재배월드바둑마스터스가 그렇다. 한국 랭킹 1, 2위인 신진서와 박정환의 대결을 지켜보는 한국 팬들로선 짚신 파는 아들과 우산 장사 아들, 둘 중 누가 이겨도 좋다.

삼성화재배는 LG배와 대조적으로 한·한 결승 빈도가 지극히 낮았던 대회다. 2007년 12회 대회 이세돌·박영훈 전 이후 이번이 2번째 한한 결승이다. 특히 최근 6년 동안 중국기사들이 우승을 독점해온 터여서, 한한 결승전이 확정된 후 후원사 삼성화재와 한국기원 관계자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후문. 한한대결 ‘아지트’ 격이었던 LG배 쪽에서 보면 어리둥절할 만 한 반전이다.

그렇다면 ‘선수’들은 국내와 외국 기사 중 누구와의 대국을 선호할까. 각자 편차가 있겠지만 결승 이전엔 외국 선수를, 결승에 오른 뒤엔 자국 기사를 원하는 경향이 높다. 매일 대면하는 동료와 사생결단(?) 하는 것을 큰 부담으로 느낀다. 그러나 결승 언저리까지 올라가다 보면 개인을 넘어 국가적 역할을 의식하게 되고, 그런 측면에선 동료와의 동반 결승전이 더 편하다.

1989년 마치 한중 간 국제전쟁처럼 벌어졌던 제1회 잉창치배서 우승한 뒤 조훈현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이제 창호가 해 주겠지”라며 중얼거린 것은 진심이었다. 바둑 흥행국가 숫자가 극도로 좁혀지고 내셔널리즘이 코팅 되면서 한 중 정상권 선수들이 받는 압박감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지난해 7월 제3기 용성전 시상식에 나란히 선 우승자 신진서(왼쪽)와 준우승자 박정환. 두 사람은 일곱 살의 연령 차이에도 불구하고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며 통산 2번째 세계 결승을 앞두고 있다. /한국기원

이번 삼성배서 먼저 결승에 오른 박정환은 “내일 신진서 9단을 응원하겠다”고 했고, 신진서도 이튿날 승리 후 “한국 우승이 결정돼 무엇보다 기쁘다”고 화답했다. 두 기사가 얼만큼 압박감에 시달려 왔는지 다른 종목 선수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 바둑계는 이번 대회 참패 후 출전기사와 해당 기원을 성토하느라 시끄럽다.

박정환과 신진서가 특별히 가까운 관계인 것도 사실이다. 이번 결승 한 달 여 전 열린 춘란배를 앞두고 선배 박정환이 연습 상대를 자청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케이스는 매우 드물다. 평소 스스럼 없이 대하던 기사들도 결승 일자가 가까워오면 적의를 감추기 위해 눈길을 피하는 동네가 승부 사회다.

바둑계에서 가장 난감한 역할은 타국 주최대회 결승에 오른 자국 기사 2명을 인솔하고 해외 원정에 나가는 일이라고 한다. 과거 한 경험자로부터 들은 얘기다. “출국 단계부터 두 사람이 서로 외면하고 껄끄러워했다. 그들과 함께 비행기 탑승, 현지 투숙, 식사 관리, 산책 등 모든 일을 함께 하다보니 완전 탈진할 지경이었다.” 코로나 사태 이전 국내외를 직접 오가며 대국하던 시절 얘기다.

신진서와 박정환은 한국 바둑이란 이름의 자전거를 떠받치는 2개의 바퀴다. 누가 앞바퀴이고 누가 뒷바퀴냐 하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며칠 뒤 삼성화재배 시상식에서 각자 트로피 하나씩 들고 함께 함박웃음을 짓는 두 기사를 빨리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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