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한 스푼] 달콤하고도 쓴 '관계자들의 입'
[미디어오늘 김수지 월간 신문과방송 기자]
“정부는 유류세 인하 방안을 검토한 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10월15일, 기획재정부는 '정부가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이와 같은 해명자료를 냈다. 이미 몇몇 언론사가 정부 부처 관계자 입을 빌려 정부의 유류세 인하 검토를 기사로 전한 후였다. 기획재정부는 10월17일에도 동일한 해명자료를 배포하며 쐐기를 박았다. 언론은 '정부가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기획재정부 입장을 그대로 받아 기사로 썼다. '정부의 유류세 인하 검토'를 썼던 여러 기사가 오보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정부의 유류세 인하 검토 기사는 오보가 아니었다. 해명자료를 낸 지 사흘 만에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고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왜 입장을 며칠 만에 바꿨냐는 한 의원의 질문에 “내용 확정 전 공개됐을 때 혼란을 감안”해 해명자료를 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제대로 된 기사를 썼다가 이를 번복하는 해명자료를 다시 받아쓰고, 또다시 해명자료를 뒤집는 기사를 써야 했을 기자들은 무척이나 황당한 상황이었을 거다.
정부 입에 따라 기사에 서술된 사실관계가 며칠 사이에도 뒤바뀌는 이 상황, '관계자 저널리즘'의 전형이다. 관계자 저널리즘은 출입처나 보도 자료에 의존해 기사를 쓰는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출입처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가 던져준 정보만이 유일한 '정보 비대칭성'의 상황에서, 정보가 부족한 기자들은 관계자 입만 바라보는 관계자 발 기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이때 의제 설정 권한은 그대로 정부 부처에 넘어가게 된다. 정부가 입을 열지 않으면 기사가 없고, 입을 열면 기사가 보도되니 정보를 발표할 시기를 결정하는 건 언론이 아닌 정부가 돼버리는 것이다. 이번 유류세 인하 검토를 두고 정부가 보도 타이밍을 잰 것도 '의제 설정 키'는 정부에게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선 언론이 권력을 제대로 감시할 리 만무하다.
의제 설정 권한을 정부에 넘겨주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오보'다. 올해도 관계자 저널리즘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여러 오보가 탄생했는데 대표적인 게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화이자 백신 생산'과 '포털뉴스 편집권 폐지' 오보다. 한국경제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화이자 백신을 위탁 생산할 것'이라는 정보를 익명의 정부 관계자에게 받아썼고, 결국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제휴 파트너가 화이자가 아닌 모더나로 공식 발표되면서 결과적으로 오보를 쓴 꼴이 됐다. 경향신문도 '네이버·다음 뉴스 편집 완전히 손 뗀다'는 기사를 익명의 민주당 관계자를 출처로 보도했다. 민주당 미디어혁신특별위원회가 포털이 운영하는 알고리즘 뉴스 제공 서비스를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여러 차례 논의 끝에 포털 사업자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게 기사 내용이었다. 보도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과 포털사는 반박 입장을 냈다. 특히 네이버는 “경향신문이 입장조차 묻지 않았다”고 밝혔다. 관계자 말에만 기대지 않고 포털사를 추가 취재했으면 없었을 안타까운 오보였다.
관계자 저널리즘 원인으로 꼽히는 출입처 제도는 적은 인력으로 정보를 발굴해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형태의 취재 관행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출입처 제도를 없애자' 등의 논의도 이어졌지만, 그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출입처 제도가 '정보를 꽁꽁 싸매는' 정부 부처와 국가권력 기관에 그나마 대응할 차악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출입처나 보도자료 외 신뢰할 만한 출처를 찾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정보공개를 통해 보도를 뒷받침할 자료를 확보하거나 정부 부처 관계자뿐 아니라 업계나 시민단체 등의 추가 취재원을 확보하려는 시도 말이다. 물론 마감 시간에 쫓겨 쉽지 않겠지만, 최소 두 명 이상의 신뢰할 만한 출처를 찾는다는 등의 기본적 원칙을 세워두면 좋겠다. 기자 전문성을 키우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몇 년에 한 번씩 출입처가 바뀌니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자들은 부처 관계자 시각과 해설에 의존해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팩트와 전문성으로 무장한 기자는 관계자나 취재원에게 휘둘릴 수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계자 입만 바라보는 관행에 기대어 우리 언론이 무얼 포기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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