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강인과 발렌시아의 악연
발렌시아 팬들, '부실한 구단 운영' 분풀이를 이강인에게 쏟아내며 야유
(시사저널=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운명의 장난이라는 표현이 이강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드디어 발렌시아의 품을 벗어나 새로운 팀 마요르카에서 승승장구하던 이강인에게 첫 시련을 안겨준 팀은 다름 아닌 친정팀 발렌시아였다. 지난여름 그를 둘러싼 복잡다난했던 상황이 빚은 감정이 그라운드 안팎으로 투영됐다. 이강인을 기다린 것은 발렌시아 팬들의 박수와 환영이 아닌 야유와 욕설이었다.
이강인은 10월22일(한국시간) 발렌시아와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10라운드 원정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달라진 그의 위상을 보여준 시작이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자유계약(FA) 신분으로 마요르카에 입단한 이강인은 이날 5경기 연속 선발 출전에 성공했다. 발렌시아에서 뛰던 당시 이강인은 4경기 연속 선발 출전이 최다였다.
천당에서 지옥으로…이강인의 살벌했던 친정 방문기
지난여름 직접 이강인을 설득해 마요르카로 데려온 루이스 가르시아 플라사 감독은 보석이 더 빛날 수 있게 이강인을 한껏 배려했다. 이적 후 초반 2경기에서는 교체로 나서 총 20여분 정도 짧은 시간만 소화했다. 하지만 처음 선발 출전한 레알 마드리드와의 원정 경기부터 이강인이 큰 존재감을 발휘했다. 비록 마요르카가 1대6 대패를 당했지만, 팀의 유일한 득점을 이강인이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 슈팅으로 만들어 냈다. 풀타임을 뛴 이강인은 경기 내내 여러 찬스를 창출하고, 득점까지 해내 완패에도 팀 내 최고, 양팀 합쳐 세 번째로 높은 평점을 받았다.
그 뒤부터 이강인은 계속 선발 출전했고, 발렌시아전 이전까지 4경기에서 평균 78분이 넘는 출전시간을 부여받았다. 발렌시아 시절과 비교하면 경기당 평균 출전시간이 30분 이상 늘어났다. 3경기에서 팀 내 최고 평점은 모두 이강인의 차지였다. 그토록 원했던 유럽 성인 무대에서 주전으로 도약했다는 증거였다.
그런 시점에 발렌시아 원정은 묘한 경험이었다. 만 10세였던 2011년부터 발렌시아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성장한 이강인은 한국 국적임에도 성골 유망주로 긴 시간 환영받았다. 이강인 역시 마요르카 이적 당시 고별사에서 발렌시아를 자신의 고향으로 언급할 정도로 축구 인생의 절반을 보낸 곳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 그가 다른 유니폼을 입고 발렌시아의 홈구장인 메스타야를 찾게 되자 지역 언론들도 확 달라진 입지의 이강인을 경기 전 가장 주목했다.
이적 후 54일 만의 메스타야 방문. 늘 익숙했던 발렌시아의 하얀 유니폼이 아닌 마요르카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나선 이강인은 변함없이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전반 32분 그의 발에서 선제골이 조립됐다. 오른쪽 측면을 돌파해 들어가 골라인 앞에서 양발을 이용한 드리블로 발렌시아 수비진을 차례로 무너트렸다. 페널티박스 안에서 침착하게 내준 크로스를 앙헬 로드리게스가 마무리하며 선제골로 이어졌다. 시즌 첫 어시스트를 발렌시아를 상대로 기록한 것이다.
이 장면은 프리메라리가 사무국이 선정한 10라운드 최고의 어시스트 세 장면 중 하나로 꼽혔다. 이강인의 탁월한 개인 기량을 모아놓은 명장면이었다. 이강인은 전반에만 팀 동료에게 완벽한 찬스를 열어주는 키패스를 3개나 기록했다. 마요르카는 전반 38분 발렌시아 수비수 디아카비의 자책골까지 묶어 전반에만 2대0으로 달아나며 승기를 굳히는 듯했다.
팀 성적까지 부진한 발렌시아, 이강인 선전에 질투와 분노
하지만 후반 9분 뜻밖의 상황이 나왔다. 공을 놓고 경합하는 과정에서 이강인은 발렌시아의 미드필더 다니엘 바스의 다리를 스터드(신발 밑창에 징 모양으로 돌출된 부위)로 가격했다. 전반에 이미 경고가 한 장 있었던 이강인은 경고 누적 퇴장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퇴장을 직감했는지, 파울과 함께 누운 이강인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이강인의 프로 통산 여섯 번째 경고이자 세 번째 퇴장이었다.
이강인에게 더 뼈아픈 것은 경기 결과였다. 수적 열세에도 2골 차 리드를 지키던 마요르카는 추가시간에만 2실점을 하며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당초 루이스 가르시아 플라사 감독은 경고가 한 장 있는 것을 감안해 후반 15분경 이강인을 교체하려고 했지만, 일은 그 전에 터지고 말았다. 그는 "이강인도 자신에게 특별했던 경기에서 그런 반칙을 범하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축구에선 가끔 이런 일이 나온다"며 잘못을 감쌌다.
경기 내용과 결과 이상으로 화제였던 것은 이강인을 향한 발렌시아 팬들의 반응이었다. 경기 전 마요르카 선수단 버스가 경기장에 도착할 때부터 일부 발렌시아 팬은 이강인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입장할 때, 그리고 선제골을 도운 뒤 이강인이 마요르카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자 경기장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발렌시아 팬들은 퇴장으로 54분 만에 물러나는 자신들의 옛 보물을 향해 환호로 포장된 조롱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복잡한 분위기는 발렌시아의 현 상황과 연결된다. 발렌시아 유소년 아카데미가 키운 최대 역작이었던 이강인은 한때 바이아웃 금액으로 8000만 유로(약 1100억원)가 책정됐다. 특급 유망주라는 증거였다. 만 17세에 프로에 데뷔한 그는 팀의 미래를 이끌 선수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군 무대에 진입한 뒤 확실한 기회를 받지 못했다. 프로 무대에서 3년간 62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조차도 대부분 교체 출전이었다.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데 불안감을 느낀 이강인은 임대 이적을 요청했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불만과 불신이 쌓여 갔고, 결국 이강인은 계약 만료 1년을 남겨놓고 팀을 떠났다.
이 과정에서 발렌시아의 처참한 팀 운영 능력이 도마에 올랐다. 계약 기간이 남은 만큼 비싼 이적료를 받고 이강인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적시장에서는 1000만 유로가량이 언급됐다. 하지만 발렌시아가 성급하게 브라질 공격수 마르코스 안드레를 영입하는 바람에 이게 무산됐다. 프리메라리가는 유럽연합(EU) 소속이 아닌 국적의 선수는 4명만 등록할 수 있는데, 이강인을 미처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안드레를 성급하게 데려온 것이다. 결국 발렌시아가 어떻게든 이강인을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팀들은 발을 뺐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유리한 쪽은 이강인을 영입하려는 팀들이었다. 결국 발렌시아는 시즌 소화를 위해 단 한 푼의 이적료도 건지지 못한 채 이강인을 자유계약으로 풀어줘야 했다.
올 시즌 발렌시아는 유럽축구연맹 클럽대항전(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 출전권 경쟁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지난 시즌 13위에 이어 올 시즌도 10위권 밖을 맴돌며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해외가 아닌 스페인 리그에 남은 이강인은 언젠가는 친정팀 발렌시아와 재회할 운명이었다. 구단의 계속되는 실책에 지친 팬들의 불만은 자신들의 품을 떠나 새롭게 날갯짓하는 이강인을 보며 질투와 분노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이강인도 퇴장으로 인해 연속 선발 출전 기록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러모로 비극으로 끝난 이강인의 첫 친정 방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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