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 "'물태우' 국민 능동적 관심 표현..6·29선언, 선거용 아냐"

정병묵 2021. 10. 30. 11:53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이듬해 대선을 위한 승부수가 아닌 시대 흐름의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평가했다.

노 전 총리는 30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 (노태우) 각하께서 하신 6·29 선언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한 승부수라고 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에 이어 바뀐 한국사회 구조의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밝혔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30일 故노태우 전 대통령 영결식 거행
노재봉 전 총리 추도사 통해 고인 기려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이듬해 대선을 위한 승부수가 아닌 시대 흐름의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평가했다.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고 노태우 전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스1)
노 전 총리는 30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 (노태우) 각하께서 하신 6·29 선언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한 승부수라고 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에 이어 바뀐 한국사회 구조의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밝혔다.

6·29 선언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대표위원이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 특별선언이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다음해 집권을 위해 마지못해 한 선언이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고인이 바뀐 시대 흐름을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높게 평가한 것이다.

노 전 총리는 “개인과 국가 간 직접적 지배와 복종 구조에서 영근 시민사회의 출현에 의해 체제의 변화를 확인해 준 최초 선언이었다”며 “각하께서 체제 변환을 전제로 저에게 (이 점을) 수없이 반복해 결의하셨던 걸 잊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리더십을 비하하는 별명이었던 ‘물태우’에 대한 언급도 했다. 노 전 총리는 “오랫 동안 권위주의에 익숙했던 이들은 각하를 ‘물태우’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며 “각하는 이를 시민사회 출현에 따른 능동적 관심이 싹트는 것이라고 판단하셨다”고 언급했다.

특히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라는 고인의 말도 이러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며 “한국전쟁 후에는 문맹률이 80%가 넘고 정규 육군사관학교 1기생 엘리트 장교들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은 숙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이던 1991년 2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날 추도사를 낭독하며 수 차례 울먹이며 눈물을 훔쳤다.

노 전 대통령의 유족 등은 영결식이 끝난 뒤 오후 1시 30분께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진행한다. 이후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됐다가 파주 통일동산에 안장된다.

정병묵 (honnezo@edaily.co.kr)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