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노태우 재평가’와 ‘문재인 송덕비’

강천석 논설고문 2021. 10. 30.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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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벌어 오늘 먹는 하루살이
날품팔이 대통령으론 나라 장래 없어
국민이 아무렇게 대통령 뽑으면
‘국가 回復力’ 바닥나는 사태 닥쳐

우리는 미래의 시간을 ‘단기’ ‘중기(中期)’ ‘장기’라는 세 구획으로 구분한다. 대중은 단기적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떠내려간다. 예언자 흉내를 내는 허황된 정치인들은 민족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50년 100년 밖의 미래를 판다. 그러나 정치에서 의미 있는 시간은 ‘중기’다. 정책의 씨앗을 뿌리고 싹이 트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다. 대중은 더 지겨워한다. 이런 대중의 성화를 달래가면서 뿌리에 거름을 주고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가 ‘중기의 정치’다. 언제부턴가 한국 대통령은 오늘 벌어 오늘 먹는 날품팔이가 되고 말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 곽상언 변호사가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위로하고 있다. 2021.10.29 /사진공동취재단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과오는 분명하다. 쿠데타 주모자(主謀者) 중 하나였고 광주를 탱크로 짓밟고 시민을 살상(殺傷)한 당시 군부 지휘부에 있었으며 대통령 재임 중에 막대한 비자금을 모았고 여러 비리(非理)에 연루됐다. 작고하기 전 가족을 통해 ‘저의 부족했던 점과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국민에게 전하는 말을 남긴 것도 이런 자신의 발자취를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만큼 후대의 국가 방향과 국민 생활을 바꿔놓은 대통령은 드물다. 국민들은 지금 매월 국민연금을 붓거나 타면서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연금 재원이 바닥날 걸 걱정한다. 국민연금은 노태우 시대에 만들어졌다. 건강보험이 처음 생겼을 무렵 병원에 가면 행색이 누추한 사람일수록 이마에 주름이 깊었다. 건보 미가입자(未加入者)는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보가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된 게 노태우 시대다. 오전에 부산·광주의 집을 나와 서울에서 일을 보고 오후에 귀가(歸家)하는 ‘전국 1일 생활권’ 시대를 당연하게 여긴다. 30년 전엔 이게 꿈 같은 이야기로 들렸다는 사실을 국민의 3분의 2는 모른다. 한국의 공기업 가운데 가장 자주 세계 1위로 꼽히는 게 인천공항이다. 고속전철과 인천공항은 노태우 시대에 첫 삽을 떴다. 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세우기만 한다면 ‘미친 집값’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노태우 시대의 분당·일산 신도시 건설이다. 노 전 대통령은 10년·20년·30년 후 국민 생활을 바꾼 ‘중기형(中期型) 대통령’이었다.

한국 외교와 대북(對北) 정책의 역사는 노태우 이전(以前)과 이후(以後)로 뚜렷이 구분된다. 1990년대만 해도 김일성의 6·25 남침 계획을 승인하고 지원했던 소련·직접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던 중국과의 국교(國交) 수립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 동구권 몰락, 소련의 개혁·개방,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권력 장악이라는 세계사적 전환을 비집고 중국·소련과 외교 관계를 터 한국의 외교 영토를 단번에 세계로 확장했다. 남북한 동시 UN 가입도 그 연장선상에서 가능했다. 모든 남북 합의를 휴지장처럼 구겨 던지는 북한조차 필요할 때면 노태우 시대에 만든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들고 나온다.

군부독재 시대를 거친 나라는 군부가 물러나도 오랜 세월 쿠데타설(說)에 시달린다. 한국은 군부독재가 끝나고 나서 쿠데타설에 휩싸이지 않은 세계 유일의 나라다. 군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이 군부 독재의 뇌관을 제거하고 김영삼 시대에 폭탄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2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는 문재인 시대에 이르러 말기암(末期癌) 증세를 드러내고 있다. 나라 전체에 전이(轉移)돼 간단한 수술로는 도려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공수처·검찰·경찰이란 국가 공권력 시스템은 거짓말을 비명(悲鳴)처럼 내지르며 붕괴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집권당 대통령 후보 시절 ‘6·29 선언’과 후속된 개헌으로 탄생한 이른바 ‘87년 체제’가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시기와 맞물려 허물어지는 것은 묘(妙)한 인연이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4년 반을 돌아보는 마지막 국회 연설을 했다. ‘사과’도 ‘용서’도 없고 ‘자랑’만 가득했다. 시골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고을 수령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송덕비(頌德碑)’ 가운데 성한 비석이 드물다. 훗날 백성들이 비문(碑文)을 깎아내거나 허리를 동강내버렸기 때문이다. 떠난 후 남이 세워주는 비석만 오래가는 법이다.

나라는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가 아니다. 국가의 회복력(回復力)에는 한계가 있다. 날품팔이 하루살이 대통령도 국민이 뽑고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 국민 노릇하기도 힘들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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