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오징어 게임 보러 ‘넷플맹’ 탈출한 7080

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2021. 10. 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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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사용하는 법 몰라 1억명 본 韓드라마 못보는 노년
낙오자 안고 가는 ‘깍두기’처럼 실버 보듬는 ‘디지털 포용’ 필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짝을 못 찾고 홀로 앉아 있는 오일남(오영수)에게 손을 내미는 성기훈(이정재). /넷플릭스

대기업 임원 출신 70대 후반 지인이 농반진반 말했다. “천만 영화는 하나도 빠짐없이 봤는데, 그놈의 넷플릭스를 못해 ‘1억 한국 드라마’를 못 보고 있다. 저 멀리 아프리카 사람도 보는데 70년 묵은 토종 한국인이 체면 구겼다.” 전 세계를 휩쓴 ‘오징어 게임’ 얘기였다. 이제 겨우 카카오톡을 시작한 그에게 넷플릭스는 에베레스트라고 했다.

‘오징어 게임’ 열풍을 보면서 ‘기생충’ ‘미나리’ 땐 없었던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즉 온라인에서 넷플릭스 땅을 밟지 않고선 볼 수 없다. 넷플릭스에 유료 가입해 개설한 아이디로 로그인해야,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TV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전 세계 1억4200만명이 봤다는 ‘메이드 인 코리아’ 드라마인데, 정작 ‘본토’ 한국 땅에서 볼 엄두조차 못 내는 이들이 적잖다.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 익숙하지 않은 실버 세대가 대표적이다.

이 ‘기술 장벽’을 한번 넘어볼 것인가 말 것인가. 최근 오징어 게임 때문에 이런 고민에 빠진 70~80대를 종종 본다. 세대 간 디지털 격차뿐만 아니라 노년층 내부에서 ‘넷플릭스 디바이드(Netflix divide·넷플릭스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간의 격차)’가 생겨나고 있다.

70대 중반 지인은 “잔혹하고 선정적이라 보기 싫다”고 해놓고선 말을 주워 담았다. “어떻게 보는지 몰라 볼 수도 없다. ‘청불’인데 중학생 손자 놈이 부모 몰래 봤다고 며느리가 하소연하더라. 나중에 녀석에게 알려달라고 하고 싶더라”며 웃었다. 이번 기회에 적극적으로 ‘넷플맹(넷플릭스 문맹)’에서 탈출하겠다는 부류도 있다. 법조인 출신 80대 지인은 유튜브로 ‘간추린 오징어 게임’만 보다가 딸에게 부탁해 스마트폰에 넷플릭스를 깔았다. 축약본만 보니 베스트셀러 서평만 잔뜩 읽고 정작 책은 안 읽은 격이라 찜찜했단다. 뭣보다 눈만 뜨면 오징어 게임 뉴스가 쏟아지는데 세상 사람들의 감정선을 못 따라가는 게 서글퍼 용기 냈다고 했다.

‘넷플 효도’도 생겨났다. 한 친구는 80대 시어머니가 오징어 게임을 보고 싶다고 해서 TV로 넷플릭스를 볼 수 있게 연결해 드렸다. 첫날, 새벽까지 오징어 게임 9편을 몰아보고 다른 드라마를 시작하며 “신세계가 열렸다. 행복하다”고 기뻐하시는 모습에 뭉클했단다. 몇 해 전 시아버지와 사별하신 뒤 처음으로 시어머니가 ‘행복’이란 단어를 꺼냈다고 한다.

디지털 기술이 자꾸만 노인들의 자존감을 잠식한다고 하지만, 주변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이 괴물이 노년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UN 건강한 고령화(Healthy Ageing) 10년 계획’의 핵심은 고령층을 위한 ‘디지털 포용’이었다. 더딘 걸음으로 새로운 기술을 향해 가는 노년층을 사회가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오징어 게임을 보고 한국만의 정서라면서 감동한 것이 있다. 놀이할 때 아무 편에도 못 낀 친구를 넣어주며 같이 즐기는 ‘깍두기’ 문화다. 낙오자를 열외하는 게 아니라 보듬어 함께하는 따뜻한 정서다.

극 중 깍두기로 극적으로 살아난 한미녀는 외친다. “소외된 약자를 버리지 않은 게 옛날 애들이 놀이할 때 지키던 아름다운 규칙이라나?”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어 영어 자막엔 깍두기를 ‘the weakest link(가장 약한 고리)’라고 번역했다. 전체 조직에 피해 주는 무능한 사람, 조직의 ‘구멍’에 가까운 부정적 뉘앙스다. IT 사회에서 노년층은 소외된 약자다. 이들을 사회의 ‘구멍’으로 생각할 것인가, 함께 보듬고 갈 ‘깍두기’로 생각할 것인가. 답은 한미녀가 이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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